[정체성 혼란 한국號 어디로 가나]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듣는다

  • 입력 2005년 10월 17일 03시 10분


《대한민국의 정체성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동국대 강정구(姜禎求) 교수 사법처리를 둘러싼 논란으로 이념 갈등이 증폭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혼란이 초래된 데는 지식인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탓이 크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러시아 지성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로서 최초의 여성대사를 지낸 이인호(李仁浩·사진) 서울대 명예교수 겸 명지대 석좌교수를 만나 정체성 혼란에 대한 진단 및 처방, 지식인들의 올바른 역할 등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 이 교수는 최근 한 인터넷 웹진과의 인터뷰에서 강 교수의 발언에 대해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인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상식도 갖추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으며 지난해 10월 열린 서울대 교수협의회 주최 대토론회에서는 “새 정부 출범 이래 가장 두드러진 사회적 변화가 반(反)엘리트주의와 반지성주의의 표출이라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국가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성적 대화의 장(場)이 없다는 점”이라고 우려한 바 있다.》

―최근 대한민국의 정체성 자체가 위기를 맞은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왜 이런 상황에 이르렀다고 보는가.

“지성의 위기가 정체성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본다. 지식인들이 추상적인 이상과 구체적 현실을 구별하지 못한 채 너무도 자명한 것을 오도하고 있다. 남북관계의 인식에서 북한 동포를 사랑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면서 통일을 이루자는 바람과 북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은 별개인데 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지식인들이 민주화운동 때 강조하던 인권 자유 등의 가치들을 북한에는 적용하지 않고 있다. 북한이 공산주의라고 하면서도 권력세습 체제를 유지하는 문제, 주민을 먹여 살리지도 못하는 현실, 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억압적 폐쇄 체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런 나라를 만든 김일성 주석을 위대한 지도자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어느 체제가 더 나은지는 세계에서 이미 판정 났는데 우리만 외면하고 있다.”

―지성의 위기가 국가 정체성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지성의 위기는 어디에서 비롯했다고 보는가.

“유신시절의 후유증이라고 본다. 반공적 친정부적 민족주의자를 길러 내기 위해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역사교육도 국사 위주로, 그것도 정부 마음대로 각색한 국사를 가르치면서 우물 안 개구리 식 안목밖에 키우지 못했다. 그 결과로 오늘날 복고 성향의 민족주의만 남고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현실을 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없어졌다. 또 공산주의의 실체를 가르치진 않고 무조건 반공교육만 한 반작용으로 민주화 세력 일부에서는 북한이 더 잘한 게 아니냐는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386세대가 제일 큰 희생자다.”

―현 정부에 참여한 지식인들이나 정부를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남한과 북한에 대한 잣대가 이중적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북한의 인권문제를 외면하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 예다. 남한에서 1980년대 반미정서가 심해진 것은 미국이 독재정권을 지원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북한의 독재정권을 우리가 무조건 지원한다면 북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면서 화해도 하고 평화공존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른 나라에서는 북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데 우리는 TV 화면에 긍정적인 면만 보여 주고 부정적인 면은 보여 주지 않는다. 북한에 대한 적대의식을 해소한다는 명분은 있지만 북한을 돕기 위해서라도 먼저 실상을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정권에 많이 참여하고 있다.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나.

“민주화 투쟁을 주도한 사람들의 문제 제기의 정당성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독재시절 탄압 받았던 경험을 살려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선 일관성이 없는 것 같다. 관용을 바탕으로 다양한 목소리와 의견을 존중하고 가장 좋은 의견을 수렴해 대세를 형성해야 한다. 특히 민족애 자존심 긍지 등 우리 민족의 긍정적 요소를 서로 부추겨 수렴해 내야 하는데도 편 가르기를 통해 질투와 시기심을 부추기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다. 평등논리가 지배해야 할 복지 분야와 생산성 논리를 중시해야 할 경제 교육 분야가 뒤죽박죽되는 것도 문제다. 이런 행태는 길게 보면 나라를 망치는 것이다.”

―최근 친일 청산, 역사 바로 세우기 등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일부 지식인들이 역사문제를 정치운동이나 사회변혁의 한 수단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대한민국은 수립 초기부터 그 체제를 전복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도전에 맞서야 했기 때문에 평등하고 자유롭게 사는 사회를 구축하려는 이상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자들이 나왔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우리는 이렇게 발전했다. 가난했던 정주영 씨 같은 사람이 재벌이 되고, 고졸 출신이 연거푸 두 명이나 대통령이 될 수 있을 만큼 이 나라는 평등하고 민주화된 나라가 아닌가.

반면 북한은 공산주의 계열의 애국자로서 김일성보다 권위가 높았던 사람들이 모두 타도되는 속에서 세습 체제가 구축되고, 국민이 굶주리고, 탈북자들이 속출하고 있지 않은가. 지식인이라는 이름을 빌려 단순한 것을 추상적인 것으로 포장해 사람들을 오도하지 말아야 한다. 광복 60주년이라면 젊은 세대에게 과거 일제가 우리를 얼마나 악랄하게 괴롭혔던가를 상기시키고 그런 고통을 견뎌 내고 오늘의 한국을 이뤄 낸 데 대해 긍지를 느끼게 해 줘야 했다. 그런데 반대로 대한민국은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해 친일파의 세상이 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제대로 된 생각을 지닌 국민이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북한 핵무기의 위력은 결국 남한을 볼모로 하기 때문에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미동맹의 상징물과 같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걸러지지 않고 터져 나온다.

“북한은 미국이 자신들을 공격하려고 해서 핵무기를 개발한다고 하지만 핵문제만 없다면 미국이 뭣하러 북한을 공격하겠는가. 현재의 위기는 북한이 만든 것이다. 미국을 비판하거나 미국에 대한 호불호와 동맹국으로서 잘 지내야 하는 것은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왜 하필이면 광복 60주년에 맥아더 동상이 공격돼야 하는가.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함으로써 대한민국을 구출했을 뿐 아니라 우리를 억압하던 일본 제국주의를 패망시키고 일본의 평화헌법 체제를 정착시킨 사람이다. 오랜 시기가 지난 뒤 그 의미가 자연스럽게 상실됐을 때라면 동상을 치울 수도 있겠지만 6·25전쟁에 참가해 나라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는데 맥아더 동상을 공격해서 이득을 보는 사람이 누구일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주국방은 바람직하지만 우리의 정보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 현실인 상황에서 형식적인 그런 주장은 우리의 힘을 약화시킬 뿐이다. 통일을 위해서라도 정치적 경제적으로 힘을 갖고 대외적으로 동맹세력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힘을 빼는 게 통일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지식인 사회에서 나오고 이 나라를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에게서 나온다니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다. 민족도 중요하지만 국가가 더 중요한데 민족공조라는 최면술에 걸려 자신의 입지를 계속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인 것 같다.”

―강 교수는 베트남식 통일이 뭐가 나쁘냐고 주장한다. 어떤 식으로든 통일만 되면 우리 민족이 모두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통일지상주의의 발로가 아닌가 한다.

“통일을 이야기할 때 무엇을 위한 통일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통일만 되면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논리일 뿐이다. 치열한 국가경쟁이 벌어지는 세계에서는 국가체제를 지키고 국익을 보호하는 데 한 치의 실수도 허용할 수 없는 것이다. 로버트 김 씨의 사례에서 보듯 우방 사이에서라도 하찮은 정보를 빼돌린 것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처벌하는 것이 국가관계의 운영 양식이다.”

―대북관의 이완 현상은 일부 지식인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좌파 지식인들이 추상적 논리와 환상에 빠져 있다면 일반인들은 북한을 너무 경시하고 있다. 정치, 권력관계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잘 몰라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모든 공산주의 국가는 고도의 선전 선동 기술을 갖고 움직인다는 것을 모른다. 속임을 당하는 줄도 모르고 당하는 수가 많다. 우리 국민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 많은데 북한에 줄 때는 구체적으로 얻는 게 분명히 있어야 한다. 현대 문제만 해도 그렇다. 현대는 사업 독점권을 위해 막대한 대가를 이미 지불했는데 그 약속을 어기고 다른 기업에 사업을 준다고 하는데도 정부가 그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한반도기(旗)라는 것도 그렇다. 일개 운동경기 응원을 위해 임시방편으로 도입된 상징물이 언제부터 누구의 결정에 의해서 국가의 상징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인가. 국기라는 게 상징성이 높은 건데 국민의 동의도 없이 한반도기로 태극기를 대체하는 것은 무슨 짓인가.”

▶이인호 교수는

▷1936년 서울 출생 ▷1960년 미국 웰즐리대 사학과 졸업 ▷1967년 미국 하버드대 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1972∼79년 고려대 교수 ▷1979∼95년 서울대 교수(서양사학과) ▷1996∼98년 주핀란드 대사(최초 여성대사) ▷1998∼2000년 주러시아 대사 ▷2004년∼현재 명지대 석좌교수 ▷2005년 광복 6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고문 ▷저서 ‘지식인과 역사의식’ ‘러시아 지성사 연구’ 등, 역서 ‘혁명기 러시아와 소련’ ‘인텔리겐찌야와 혁명’ ‘지식인과 저항’ 등 출간

정리=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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