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는 하반신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중증장애의 몸으로 장애인과 홀로 사는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목욕과 물리치료, 집안 청소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해 준다.
또 병원 입퇴원, 민원서류 발급, 이발, 반찬 만들기 등 장애인이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토털 서비스’를 해 준다. 직접 염습을 해 장례를 치러준 사람만도 200명이 넘는다.
그는 신혼 초이던 1984년 한 섬유업체에 다니다 11t 컨테이너에 깔리는 사고를 당해 7년간 전신마비 상태로 병상에 누워 있다 상반신 마비만 부분적으로 풀렸다.
김 목사는 “너무 막막해 수십 번 죽으려고 했으나 그나마 뜻대로 되지 않았다”며 “투병생활 동안 주머니를 털어 병원비를 보태 주던 수많은 이웃의 빚을 갚지 않고서는 죽을 수도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봉사가 아닌 섬김’의 길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지금도 진통제가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자신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언제 또 오느냐”고 묻는 장애인들을 생각하면 쉴 틈이 없다.
김 목사의 소원은 번듯한 교회를 여는 것도, 15평 임대아파트를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것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일이 더 급하다고 생각한다.
김 목사는 “이동 목욕차량을 한 대 마련하고도 운영비가 없어 봉사활동을 나가지 못하는 상황만 생기지 않는다면 더 바랄 게 없다”면서 “봉사란 ‘빚’을 갚는 과정이며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해 주는 사랑의 저축”이라고 말했다.
전주=김광오 기자 ko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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