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 교수의 기도 영빨 ▽
보수주의자들이 7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한 경력을 흔쾌히 인정해주는 경우가 가끔 있다. 소위 ‘전향’을 한 사람들이 이상한 얘기를 늘어놓을 때다. 그때는 그 삑사리에 찬란한 아우라를 주느라 보수주의자들도 70년대 민주화 운동을 신성한 배경으로 추앙해준다. 이번에 “건달 정부” 운운하는 상소리를 늘어놓은 안병직 교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식민지반봉건
안병직 교수는 이제 와서 현정권을 “민족주의적”이라 비난하지만, 운동권 일각의 민족주의적 성향, 흔히 NL이라고 부르는 흐름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준 게 바로 안병직 교수다. 그는 70년대에 한국의 사회구성체를 ‘식민지반봉건사회’로 규정한 바 있다. 즉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이며, 그로 인해 자본주의화가 덜 된 반쯤은 조선시대 같은 사회라는 것이다.
이런 그의 논리는 학적으로는 이미 80년대에 폐기처분됐다. 물론 운동권 내에는 그의 이론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이들이 여전히 많았지만, 그들 역시 워낙 이론 자체가 현실과 맞지 않자, ‘식민지반봉건사회론’ 대신에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을 들고 나왔던 게 기억이 난다. ‘반봉건’이나 ‘반자본’이나 그게 그거인데, 워낙 식민지반봉건론에 대한 비판이 심하자 대중을 상대로 ‘조삼모사’의 해프닝을 벌인 것이다.
70년대의 한국경제를 일제시대와 같은 ‘식민지반봉건사회’로 보는 것은 시대착오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는 후에 부랴부랴 ‘중진자본주의론’이라는 것을 내놓았지만, 썰렁하기로 따지면 ‘식민지반자본주의론’라는 것과 온도차가 별로 안 난다. 그 후로 내가 들은 소식은 <낙성대 연구소>라는 것을 만들어, 한국 자본주의 발달에 일제의 식민지배가 기여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밝혀내는 데에 몰두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극단에서 극단으로
안 교수의 머리를 끝까지 사로잡은 것은, 한국의 자본주의가 외세 때문에 발전을 못한다는 민족주의 이념이었다. 그런데 ‘식민지’라는 한국에서 자본주의는 계속 발전하기만 하니, 어떡한단 말인가? 한국사회를 부당하게 ‘식민지’라 규정을 해놓았으니, 그 속에서도 경제발전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기적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 충격에 결국 우익으로 돌아선 모양이다.
‘식민자반봉건’이라는 안병직 교수의 규정에서 도출되는 실천적 결론이 바로 반미자주화를 통한 근대화 노선이다. 상당수의 운동권은 이미 80년대에 그 논리를 폐기했고, 나머지들은 늦어도 90년대에 폐기했고, 지극히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아직도 그 믿음을 유지하고 있다. 흔히 NL 내에서 ‘주사파’라는 부르는 사람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사파’란 실은 안병직 교수의 이론에 취했다가 아직 술이 덜 깬 이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안병직 교수의 ‘민족주의’ 비판은 실은 자아비판인 셈이다. 자기비판을 남에 대한 비난의 형식으로 하는 것. 그게 제 양심을 지키는 안 교수의 독특한 방식이다. 하지만 그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이미 ‘식민지반봉건론’과 ‘반미자주화’ 노선은 오래 전에 파탄을 맞았다. 아울러 민족주의의 술에 취한 역사학계 일각을 비판하기 위해 조선의 발전에 일제가 기여했다는, ‘깨는’ 소리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냉전으로 회귀
안병직 교수가 현 정권을 ‘건달정부’라 부를 자유는, 내가 그를 ‘건달교수’라 부를 자유만큼 소중하다. 문제는 그 비판이 얼마나 건전한 논증 위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이다. 현 정부에 대한 안병직 교수의 비난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안 교수의 문제는, 70년대 사회를 식민지반봉건 사회로 바라보던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전혀 현실 감각이 없다는 데에 있다. 문화일보의 컬럼을 보니, 그가 뉴라이트 단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김정일 정권을 그냥 두고 통일하자는 것은 남쪽이 김정일 정권 밑으로 들어가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김정일을 원조해서 연명시키는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심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 김정일 정권을 포위해 붕괴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최선이다. 붕괴 이외엔 현실적으로 다른 방법이 없다.”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지고, 개성공단의 경제협력이 계속되고, 남북이산가족의 만남이 이어지고, 심지어 한나라당에서마저도 휴전선에 경제특구를 건설하자고 하는 상황에서, 아직도 이런 발언을 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앞으로 대북관계에서 할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말대로 김정일 정권을 붕괴시켜 놓으면, 그 다음엔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저 발언을 소개하는 문화일보의 칼럼에서 윤창중 논설위원은 안교수의 발언을 소개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노 정권에 곡학아세하고 있는 후학들은 안교수의 고언을 듣고 있는가. 노 교수의 이런 지성이 존재하는 나라엔 아직 희망이 있다.” 그러는 윤창중 논설위원은 먼저 현대자본의 현정은 회장부터 금강산 사업 철수하고, “김정일 정권을 포위해 붕괴환경을 조성” 하는 데에 협조하라고 촉구할 일이다.
신자유주의
지금 서민들이 받는 고통의 핵심인 사회적 양극화를 보자. 그것의 원인은 역대 정권에서 추진해온 이른바 ‘신자유주의’ 정책에 있다. ‘세계화’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구조조정 과정 속에서 수많은 실직자가 발생하고, ‘고용유연화’라는 명분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확산되고, 노동시장에서 퇴출당한 이들이 대거 음식점을 차리면서 자영업의 근간마저 흔들리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어디 민족주의가 있고 사회주의가 있단 말인가?
사회적 양극화의 또 한 축은 농민 문제다. 농업 정책만 해도 그렇다. 대한민국은 농업은 사양산업이 되어 농가는 부채에 허덕이고, 농촌은 몰락하고 있다. '우루과이 라운드‘로부터 시작해서 최근의 쌀 협상 비준안에 이르기까지, 우리 농산물을 외국의 값싼 농산물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줄 장벽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쌀 협상 비준안을 서둘러 처리하는 정부 여당의 모습에 어디 민족주의가 있고 사회주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대기업의 등살에 몸살을 앓는 중소기업 대책에 관한 현 정권의 태도는 무엇인가? “권력은 시장에로 넘어갔다”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 무슨 사회주의적 제스처가 있단 말인가. 대기업의 경우를 보자. 지금 민족주의를 외치는 것은 외려 재벌들이다. 재벌의 소유구조를 개혁하라는 요구에, 재벌들이 뭐라고 대답하던가. 그렇게 할 경우 경영권을 방어할 수 없어 우리 기업들이 줄줄이 외국 자본의 손에 넘어갈 것이라며, 자본의 국적성과 민족성을 강조하지 않던가.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경기회복과 더불어 해소될 수 있는 순환적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물결의 여파로 미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서유럽도 앓는 전세계적 질병이다. 즉 서민의 삶의 위기는 안병직 교수가 현정권이 가졌다고 비난하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 원이 있는 게 아니다. 외려 그가 대안으로 제시하고, 정권이 충실히 실천하고 있고, 한나라당이라면 더 가열차게 실천할 “국제주의와 자유주의”의 필연적 결과다.
기도의 힘
사회적 양극화는 현 정권에서 기대하듯이 지표경기의 회복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나라당에서 내놓은 알량한 감세안 나부랭이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감세를 해야 제일 많은 혜택을 받는 것은 강남 부유층인데, 지금 내수 부진이 부자들이 지갑 안 열어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50%이상의 국민이 면세점 이하로 사는 마당에 그게 내수회복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지금 기업들이 돈이 없어서 투자를 못하는 것도 아니잖은가.
사회적 양극화, 사회의 고령화, 사회적 안전망 구축 등은 '비전'을 요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여야가 정쟁의 소재로 삼을 문제도 아니고, ‘뉴라이트’니 어쩌구 하며 소모적인 이념논쟁 속에 날려버릴 대상도 아니다. 한 정권의 교체와 상관 없이 일관되어야 할 장기적 전략을 수립하는 문제다. 이를 위해서는 초당적인 협력은 물론이고, 서구 몇몇 나라에서와 같은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하다.
“사고가 나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
절망에 빠진 안병직 교수. 기도를 올리기로 한 모양이다. 가끔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리는 구국기도회에서 앞으로 안 교수가 애국 목사, 호국 장로, 안보 집사님들 더불어 나라를 위해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보게 될 모양이다. 이번에는 97년 지금의 한나라당이 나라 말아먹었을 때처럼 "사고"가 나지 않도록, 부디 영빨의 출력을 한껏 높이시기를. 오, 주여, 우리를 구하소서. 할렐루야 아멘.
글·진중권(시사평론가·‘SBS 전망대’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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