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문학평론가인 유종호(柳宗鎬·71·사진) 연세대 특임교수가 21일 발간될 문예지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기고한 ‘안개 속의 길-친일 문제에 대한 소견’을 통해 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집권세력이 추진하는 친일 청산과 일부 진보단체가 주도하는 친일 명단 작성에 대해 문학계 내에서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양쪽 다 사실상 말문을 닫고 있는 상황에서 유 교수가 논쟁의 물꼬를 튼 것이다.
그는 “최근 친일인사 명단을 작성한다는 움직임을 보면서 문득 과거의 유병진(柳秉震) 판사를 떠올렸다”고 했다. 유 판사는 1958년 당시 진보당 강령이 국시에 위반된다며 검찰이 사형을 구형한 사건에 대해 1심에서 진보당원 대부분에게 무죄를 선고해 ‘용공 판사’로 몰렸던 인물.
유 교수는 예전에 유 판사가 쓴 ‘재판관의 고민’이란 책을 인용했다. 책에는 유 판사가 6·25전쟁 중의 부역자들을 재판하면서 느낀 고뇌가 담겨 있다.
“많은 이가 서울을 사수할 테니 안심하라는 정부의 말을 믿고 남았다가 살기 위해 부역했다. 이런 시민들한테 죽음이나 망명을 택하지 않았다고 사형이나 무기 같은 중형을 선고하는 게 과연 바른 것인가?” 유 판사는 인민군의 위협에 마지못해 심부름을 해 줬다가 부역자로 끌려온 열네 살 소년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유 교수는 “일제 말기 국민총동원 체제의 숨 막히는 분위기를 유년기에 겪어 본 마지막 세대로서 최근의 친일 논쟁에 대해 소회를 밝히는 게 의무라고 생각했다”며 “그 시절은 일본에선 전멸해도 포로가 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오고, 조선의 아이들은 학교 대신 군용 송탄(松炭)을 채취하러 다니던 ‘광풍의 시기’였다”고 적었다.
유 교수는 친일문제 연구가 임종국(林鍾國) 씨가 펴낸 ‘친일문학론’에 대해 ‘노작’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여기에 거론된 작품은 대부분 ‘국민총동원’ 시기에 나온 것이다. 당시 살았던 거의 모든 문인이 친일문학 명단에 올라 있다. 시국에 끌려다니며 글 몇 편을 내놓아 친일문인으로 낙인찍힌 경우도 허다하다”고 주장했다.
유 교수는 “가령 시인 김상용의 경우 꽃집으로 호구지책을 삼다가 일제 말기에 ‘영혼의 정화’ 등 3편의 글을 쓴 것을 놓고 친일 명단에 올리는 게 공정한 일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특히 “식량 공출과 징용에 열을 올린 관리들의 친일이 무거운 것은 자명하지만, 거기에 비하면 문학이라고 할 수도 없는 허드레 저급 선전 문건을 쓴 문인들을 중죄인 취급하는 것은 형평성 없는 가혹한 저울질”이라고 말했다.
유 교수는 “친일의 단초는 백성들의 안위는 거의 안중에 없었던 조선 후기의 무능하고 후안무치한 왕들과 여기 편승했던 지배도당들에 의해 왕조가 붕괴하면서 생겨났다”며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진행되고 있는 친일파 명단 작성 작업이 이 같은 교훈을 얻어내기보다 광기에 찬 국민총동원 시기의 일들을 자주 거론하는 것은 정략이 아니냐는 의혹을 사게 된다”고 썼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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