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가 숨이 넘어갈 정도로 긴 문장, 어려운 한자어나 일본말의 잔재, ‘위법하다고 아니할 수 없어 파기를 면할 수 없다’는 것처럼 꼬고 또 꼬는 문장.
본보 법조 취재팀이 10월 25일∼11월 15일 선고된 대법원과 서울고등법원,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판결문 10개씩 모두 30개를 무작위로 골라 분석한 결과 나타난 판결문의 ‘특징’이다.
▽상급법원 갈수록 문장 길어져=30개 판결문을 대상으로 재판부 명칭과 원고 및 피고, 판결 주문이 있는 표지를 제외하고 ‘이유’부터 ‘결론’까지 판결문의 본문을 분석했다.
분석 결과 본문 한 문장의 평균 길이(글자 수)는 △대법원 373.2자 △서울고등법원 317.5자 △서울중앙지방법원 304.2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상급법원으로 갈수록 판결문의 문장 길이가 긴 것으로 나타났다. 문장이 길면 주어와 술어가 복잡해져 이해하기 어렵다. 국어학자들은 한 문장의 글자수가 100자를 넘으면 이해하기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대법원이 지난달 28일 무죄를 선고한 ‘안풍(安風) 사건’ 판결문의 경우 한 문장이 2794자나 되는 것도 있었다. A4 용지 4장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이 판결문에는 1509자, 1114자나 되는 문장도 있었다.
이처럼 상상을 넘을 정도로 긴 문장은 판사들이 같은 사건과 같은 쟁점이면 같은 문장(한 문장)에 표현하려는 방식을 고집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암호문 같은 ‘주문(主文)’=최근 민사소송에서 이기고 판결문을 받은 이모(38) 씨는 재판 결과가 쉽게 이해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판결문의 ‘주문’에는 ‘피고들(2명)은 각자 원고에게 20,000,000원 및 각 이에 대하여 소장 부본 송달 익일부터 완제일까지 연 20%의 각 비율에 의한 금원을 지급하라’고 적혀 있었다.
원고 이 씨는 ‘피고들은 각자 원고에게… 지급하라’는 부분을 보고 “1인당 2000만 원씩 모두 4000만 원을 받겠구나”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이 씨의 판결문 이해는 잘못된 것이다. 암호문 같은 ‘주문’ 때문에 이 씨가 혼동한 것이다. 판결문에서 ‘각자’는 ‘연대하여’ 또는 ‘공동으로’ 책임을 지라는 뜻이고 ‘각’은 모두 따로 또는 별도로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2명이) 각자 2000만 원을 지급하라’는 표현은 두 사람 중 한 명이 2000만 원을 지급하거나 두 사람이 각각 1000만 원씩 2000만 원을 지급하든지 해서 원고에게 2000만 원이 지급되도록 하라는 뜻이다.
▽어려워야 권위 선다?=간단하고 쉬운 표현도 일부러 어렵고 복잡하게 표현하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실익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실익이 있다)” “위법하다고 아니할 수 없어 파기를 면할 수 없다(위법해 파기한다)”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할 것이니… 판결한다(지급할 의무가 있어… 판결한다)”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산입(算入·포함시켜)해’ ‘위자(慰藉·위로하고 도와줄)할’ ‘익일(翌日·다음날)’이니 ‘완제일(完濟日·다 갚는 날)’처럼 어려운 한자어도 일반인의 판결문 이해를 어렵게 한다.
▽법원도 개선 노력 중=대법원도 이 같은 사정을 깨닫고 판결문을 쉽게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문제점이 많이 남아 있다. 몇 년 전부터 사법연수원에서는 예비 법관들이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판결문을 쓰도록 교육받고 있지만 아직 법원 전체로 확산되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경력이 많은 고참 법관일수록 판결문을 어렵게 쓰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복잡한 법률관계가 얽혀 있는 사건에 대해 판결문을 쉽고 짧게 쓰는 것을 강조하다 보면 당사자가 잘못 이해하는 오류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판사들은 역시 ‘짧고 알기 쉽게 쓰는’ 것이 ‘대세’라고 말한다.
법원에서도 판결문을 좀 더 짧고 쉽게 쓰기 위한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법원행정처 민사 사법제도 개선 연구팀은 최근 판결문을 짧고 간결하게 쓰는 것이 법관의 업무부담도 줄여 줄 것으로 보고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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