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이 된 첫해 생긴 그날 사건이 30년의 삶을 결정했어요. 그 후 단 한 번도 선물 같은 걸 받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마음속에는 사법시험에 몇 번이나 떨어진 아들에 대한 섭섭함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날 어머니의 말씀 때문에 부끄럼 없이 공무원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정부과천청사 자신의 사무실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장 실장의 얼굴에는 2001년 작고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장 실장은 경제부처 57년 역사상 일반직으로는 처음으로 정년퇴직을 하는 공무원이다. 동료나 선후배들은 일정 직급을 거치면 산하기관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그는 “무능해서”라고 겸양을 보였다.
장 실장은 7급(주사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재무부 이재국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 후 15년간 감사관실에서 재무부 산하기관 감사를 맡았다. 뇌물이나 접대를 전혀 받지 않고 원칙을 지키다 보니 ‘칼 감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저한테 ‘로비’가 안 먹히니까 윗사람들에게 ‘제발 그 사람만 보내지 말아 달라’고 사정했다는 얘기가 나오더군요. 김대중(金大中) 정부 초기에 대통령사정비서관실로 파견 갈 뻔하다가 없던 일이 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 너무 강성’이라는 얘기 때문이었다고 해서 허허 웃었습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장 실장은 대통령이 바뀌는 것을 6번 지켜봤다.
“독재정권이라는 비판을 받지만 공무원으로서 제일 일할 맛이 나던 때는 박 대통령 시절이었습니다. 최고 엘리트들이 모여 나라를 잘살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일했죠. 경부고속도로나 포항제철 같은 대형사업을 추진하면서 ‘이걸 해야 한다, 이게 되면 잘살 수 있다’는 확신에 차 밤새워 일하는 사람들로 재무부가 가득했어요.”
반대로 1980년대 후반의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시절을 가장 안타까운 때로 기억했다.
“사회적 요구가 방만하게 터져 나오면서 ‘경제 동력’이 멈춰 버린 것 같았어요. 그때 정부가 한국 풍토에 맞는 노사관계를 제대로 정착시켰다면 한국경제는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역사와 경제를 되돌릴 힘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대통령은 정말 잘 뽑아야 합니다.”
노무현(盧武鉉) 정부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표현했다. “현 정부 들어 이렇다 할 ‘분배정책’을 쓴 것도 아닌데 정권 초기에 분배문제가 전면으로 부각돼 손해를 본 것 같아요. 여기에는 국민에게 정책을 제대로 알려야 할 홍보의 책임도 있습니다.”
김용환(金龍煥) 전 재무부 장관을 시작으로 재무부 재경원 재경부를 거치며 그가 ‘모신’ 장관이나 경제부총리는 21명. 가장 존경하는 장관으로는 이규성(李揆成) 전 재경부 장관을 꼽았다. “이 전 장관은 업무 스타일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이어서 후배들의 존경을 많이 받았어요. 일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잘 알았고 권위로 지시하기보다 논리로 후배를 이끌었죠.”
일하는 짬짬이 모은 자료를 토대로 책 2권을 펴내기도 했다. 은퇴를 앞두고는 30년간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져 온 일본의 우경화를 경계하는 ‘제2의 진주만 침공’이라는 책을 한 권 더 펴냈다.
1945년 12월 24일 태어난 그는 정년퇴직을 일주일 앞두고 환갑을 맞는다. 조기 퇴직이 보편화된 요즘 세태에서는 힘든 일이다.
“청년 때 들어와 노인이 돼 떠나는데 아쉬움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오랜 시간을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 왔다는 자부심이 더 큽니다. 은퇴하면 고향인 전북 장수군 번암면에 있는 흥성 장씨 집성촌에 내려가 어머니를 기념하는 ‘사모정(思母亭)’을 짓고 주변에 나무를 키울 생각입니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장일석 FIU 기획행정실장은
△1945년 전북 장수군 출생
△1966년 한양대 정치학과 졸업
△1975년 성균관대 졸업
△1976∼1982년 재무부 이재국 근무
△1982∼85년 재무부 공보관실 근무
△1985∼2000년 재정경제원 감사관실 근무
△2000∼2003년 금융감독위원회 FIU 제도운영과장
△2003년∼현재 재경부 FIU 기획행정실장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