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6부는 9일 오전 경북 경산시의 경부고속철도 건설 공사장으로 ‘현장검증’을 나갔다가 이날 저녁 늦게야 서울에 도착했다.
공사 현장 근처에서 돼지를 기르던 최모 씨가 올해 3월 “공사 소음과 먼지 때문에 키우던 돼지들이 죽은 새끼를 낳았다”며 한국철도시설공단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낸 뒤 최근 현장검증을 신청한 데 따른 것.
재판부는 최 씨의 집과 양돈 축사의 벽에 난 균열 등 최 씨가 주장하는 피해 상황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어미 돼지가 숨진 채로 낳거나 낳다가 숨졌다고 주장하는 새끼 돼지 20여 마리의 시체도 보고 왔다.
전문 감정인으로 동행한 중앙대 도시공학과 교수를 통해 고속철도 운행 구간 근처에서 1시간 동안 소음 정도도 측정했다.
재판부는 “감정 결과는 밝힐 수 없지만 이런 사건은 판사들이 실제로 진동이나 소음을 ‘몸으로’ 느끼고 공사의 규모나 형태도 직접 봐야 재판 당사자들의 주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환경사건 전담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4부는 현장검증에 이골이 난 재판부. 최근 들어 일조권과 조망권 침해를 주장하는 손해배상 사건이 크게 늘면서 거의 매 사건 현장검증을 나간다. 지난달 중순에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 미림여고 근처의 아파트 단지로 현장검증을 갔다. 경사지로 돼 있는 지형 때문에 아파트의 층이 같아도 동이 다르면 일조 침해 정도가 달랐던 점 등을 확인했다고 한다.
판사들은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할 경우 건축 토목 등의 분야에서 대학교수 등 전문 감정인도 동행한다.
형사 사건의 경우 현장검증은 유·무죄 판단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인제(李仁濟) 의원이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가 항소심에서 무죄로 뒤집혔던 것에도 현장검증의 역할이 컸다. 이 의원에게 돈을 전달했다는 사람이 돈 전달 현장에 대한 기억을 선명하게 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돈 전달자의 진술 전반에 신빙성이 떨어지면서 이 의원 측의 무죄 주장에 힘이 실렸다.
판사들은 현장에 직접 가 보면 사건 기록이나 사진을 보고 증인의 증언을 들을 때와는 다른 느낌을 갖는다고 한다.
물론 모든 판사들이 현장검증에 적극적인 것은 아니다. 현장검증 지역이 험한 산지거나 지저분한 공사 현장이면 현장검증 자체를 기피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지난해 강원 지역의 한 판사는 임야분쟁과 관련해 비교적 높은 산으로 현장검증을 나갔다가 자신은 산 밑에서 쉬고 사건 대리인(변호사)들만 현장으로 보낸 경우도 있었다고 한 변호사는 전했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 형사부의 한 부장판사는 “현장검증은 다툼이 심한 사건 등에서 판단의 중요한 근거를 얻을 때가 많아 재판 당사자들뿐 아니라 판사들 스스로에게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판사들의 사건 부담만 줄어든다면 가능한 한 많은 사건에서 현장 검증을 실시하는 것이 재판과 판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판사들이 판사실과 법정에서 나와 현장 속으로 가까이 갈수록 재판 당사자들도 판사와 법원을 가까이 느낄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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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현장검증 어떻게▼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판사들의 ‘현장검증’이 필요한 사건은 의외로 많다.
최근 늘고 있는 아파트 층간 소음 분쟁 등 아파트 시설 하자와 관련한 다툼에는 건축, 토목 분야 전문가들도 현장검증에 함께 참여한다.
최근 논란이 됐던 친일파 토지 소송 등 토지 소유권 분쟁에서는 문제의 땅에 실제로 누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취득 시효)를 가리는 것이 중요하다.
성폭행 사건에서는 판사가 범행 현장에 나가 직원들과 함께 범행 당시 상황을 재연해 보기도 한다.
방화 사건의 경우에도 불에 탄 건물이나 집의 구조 등을 직접 보면 불이 안에서 나서 바깥으로 옮아 갔는지 아니면 바깥에서 불이 나 안으로 옮아 붙은 것인지 등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혼 사건에서도 현장검증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막대한 액수의 부동산이 재산 분할의 대상이 됐을 때는 그 실제 가격을 정확히 알아야 하기 때문.
판사는 재산 분할 대상이 되는 부동산 있는 지역에 직접 나가 주변의 땅 값이나 집값 등도 알아본다. 공장이나 병원이 재산 분할 대상일 경우 그 안의 기계설비나 의료장비의 가격도 검토 대상이다.
현장검증은 대개 재판 당사자나 피고인들의 요청에 따르지만 재판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에는 먼저 권하기도 한다.
현장검증을 신청한 당사자가 법원에 검증 비용 등을 내면 재판부는 현장검증 기일을 결정한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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