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 지친 발길 보듬고 사랑의 물길 틔우고

  • 입력 2005년 12월 30일 03시 06분


29일 밤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앞 청계광장을 찾은 시민들이 크리스마스트리에 새해 소망을 적은 쪽지를 달고 있다. 가족간의 사랑, 건강, 취직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박영대 기자
29일 밤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앞 청계광장을 찾은 시민들이 크리스마스트리에 새해 소망을 적은 쪽지를 달고 있다. 가족간의 사랑, 건강, 취직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박영대 기자
《한 줄기 맑은 물이 광장을 만들었다. 광장은 사람을 품고, 사람은 소망을 안고, 소망은 맑은 물에 실려 흘렀다. 아버지와 아들, 사랑하는 연인, 재잘거리는 여고생, 코흘리개 어린이…. 그곳에서는 모두가 미소를 짓고 희망을 얘기했다. 청계광장. 거대한 도시 안의 한 줌 공간. 700평의 작은 쉼터지만 그곳은 다사다난했던 올 한 해를 반영하는 현장이었다. 무명 가수와 세계적 예술가, 대도시 샐러리맨과 시골 할아버지가 어색하지 않게 함께 즐길 수 있는 무대이기도 했다.》

새해를 사흘 앞둔 29일 밤, 아버지와 함께 청계광장을 찾은 대학생 이성현(23) 씨는 “말없이 고생만 하시는 아버지께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나왔지만 쑥스러워 아무 말도 못했다”고 말했다.

청계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버지와 아들은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말은 없었어도 하고 싶은 말과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부자는 잘 아는 듯했다.

시민들은 저마다의 소망을 쪽지에 적어 광장 앞 크리스마스트리에 매달고 있었다.

‘2006년 이날에도 다시 여기서 같이하길…’ ‘어머님,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 주세요’ ‘필승! 취직!’ 같은 개인적인 소망이 많이 보였다.

‘←옆 사람 소원 꼭 들어주세요. 저보다 간절하네요’ ‘무사 제대!’ ‘엄마가 사랑한다고 쓰래요’라는 글귀는 웃음을 자아냈다.

광장은 생명이 모이고 되살아나는 공간이었다.

청계천 복원 후 도심 열섬 현상이 완화됐다. 청둥오리, 직박구리, 딱새, 물억새, 갈대, 꽃창포 등 동식물의 보금자리가 됐다. 서울시와 경희대 부설 한국조류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모두 21종 1700마리의 동물이 살고 있다.

광장은 사랑과 화합을 이뤄냈다.

서울시청 앞에 ‘사랑의 체감 온도탑’을 세운 ‘희망 2006 이웃사랑 캠페인’이 이곳에서 시작됐다.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만드는 구세군 종소리가 광장을 중심으로 전국에 울려 퍼졌다.

신심 깊은 불자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동지팥죽을 나눠줬고 무명의 거리 예술가들이 다양한 볼거리로 시민의 발길을 잡았다.

인터넷카페 ‘아이러브 황우석’ 회원들의 실낱같은 기원의 발걸음도 이곳까지 이어졌다. 한화 두산 SK 등 많은 기업이 삭막한 도심을 풍요롭게 만들 ‘메세나운동’(문화 예술 스포츠 지원 활동)을 펼쳤다.

회사원 심준보(35) 씨는 “특별히 정한 것도 아닌데 아내와 함께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발길이 이어졌다”며 “온갖 소망이 적힌 트리와 찬란한 조명, 끝없이 흘러가는 물을 보고 있으니 왠지 내년에는 모든 일이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심 씨는 “작은 광장 하나가 삭막한 도시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바꿔놓을 줄 몰랐다”며 “서로가 서로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내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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