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개 중소기업이 대기업도 못한 일을 해낸 것은 과학고 출신의 젊은 두뇌들로 구성돼 있기에 가능했다.
위성 제작을 총괄하는 김병진(金炳辰·38) 부사장과 선종호(宣鍾浩·37) 연구개발소장은 대전과학고와 광주과학고 1기다. 이들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국내 첫 인공위성인 ‘우리별’ 시리즈 개발에 참여했다. 김 부사장은 “기술력만큼은 자신 있다”며 “위성산업의 본고장인 미국으로의 수출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학고가 설립된 지 23년. 대학 입시기관으로 전락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과학고 출신들이 한국 과학계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1기 졸업생들이 40세에 가까워진 지금 이들은 새 파워그룹으로 부상하고 있다. 옛 지역 명문고 인맥이 점차 사라지는 한편에서 이들은 한국 이공계를 이끄는 엔진으로 등장했다.
○ ‘상위 3%’ 수재들이 모인 학교
과학고의 효시는 1983년 신입생을 받은 경기과학고. 이듬해 대전 광주 경남과학고가 문을 열었다. 이 4개교 체제로 운영되다 1988년 대구과학고를 시작으로 각 지방자치단체가 과학고를 유치하면서 18개교로 늘었다.
졸업생들이 사회에서 나름대로 기반을 잡은 과학고는 초기에 설립된 4개교 정도. 당시 입학 기준은 중학교 성적 상위 3% 이내의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지원했다. 고교평준화로 기존 명문고가 인재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동안 과학고에는 우수한 두뇌들이 몰렸다.
경남과학고 총동창회장 송동하(宋東夏·38·1기) E&WIS 사장은 “선생님들이 질문을 소화하지 못해 당황하기도 했다”며 “졸업할 때쯤 교사와 학생 수준이 같아졌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3년간 기숙사에서 한솥밥을 먹은 이들은 대부분 한국과학기술대(KAIST 학부과정의 전신)로 진학했다. 사회에서도 비슷한 길을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맥이 형성됐다.
예컨대 경기과학고 1기 60명 가운데 소재가 파악된 53명 중 9명은 교수, 30명은 기업 정부출연연구소 해외연구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 과학기술 프런티어로 성장
과학고 출신의 교수들은 산업과 연계된 응용과학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경기과학고 1기인 부산대 백윤주(白潤周·39·컴퓨터공학) 교수는 한때 ‘네이버’를 운영하는 NHN의 연구소장을 지냈다. 지금은 무선주파수 인식시스템(RFID)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3기인 포항공대 이현우(李鉉雨·물리학) 교수와 고려대 최기항(崔基恒·화학) 교수도 주목받는 소장 학자.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 교수는 반도체가 극소화될 때의 문제점을 연구하고 있다. 미국 예일대 박사인 최 교수는 세계적으로도 생소한 분야인 생유기화학 전문가다.
경남과학고도 출중한 교수를 많이 배출했다. 1기인 KAIST 황강욱(黃鋼煜·응용수학) 교수는 초고속통신망이나 무선통신망을 얼마나 설치해야 적당한지를 수학적으로 풀어낸다.
2기인 포항공대 한세광(韓世光·신소재공학) 교수는 약물전달시스템 개발 분야의 선두 주자로 꼽힌다. LG생명과학연구소에서 근무할 때 성장호르몬이 인체에서 천천히 방출되도록 하는 신약을 개발했다.
대전과학고에서는 국내(KAIST)에서 학위를 받은 토종 박사로 작년 7월 미국 하버드대 의대에 임용된 윤석현(尹錫賢·물리학·2기) 교수, 광주과학고에서는 고려대 정진호(鄭鎭浩·수질환경학·1기) 교수 등이 주목받고 있다.
원천 기술로 무장하고 기업을 경영하는 과학고 출신도 적지 않다.
경남과학고 1기 윤동현(尹童鉉) 카오스 사장은 자체 개발한 후각센서를 내장한 음주측정기를 만들었다. 세계시장 점유율 1위 제품이다.
경기과학고 1기 안광수(安光秀) 픽셀칩스 사장은 휴대전화의 액정표시장치(LCD)를 작동시키는 반도체를 개발해 중국에 수출한다. 광주과학고 출신 정종민(丁鍾珉·1기) HFR 사장은 휴대전화나 와이브로(휴대인터넷)용 중계기를 만들어 미국과 태국으로 수출한다.
과학고는 각종 최연소 기록의 산실이기도 하다. SK텔레콤 윤송이(서울과학고 3기·31) 상무는 MIT 최연소(24세) 박사를 거쳐 SK그룹 최연소(28세) 임원이 됐다. 경기과학고 9기 성균관대 윤석호(尹錫晧·정보통신공학) 교수는 최연소(27세) 교수, 광주과학고 7기 서울대 김현진(金현辰·기계공학) 교수는 최연소(29세) 서울대 교수로 유명하다.
○ 기존 명문고 대체할까
과학고 출신들이 신흥 학맥을 형성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옛 명문고 같은 영향력을 발휘할지에 대한 의견은 엇갈린다.
무엇보다도 과학고 출신 대부분은 이공계 분야에 진출했다. 정치권이나 관료, 대기업 등으로 진출한 사람이 적어 영향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각 분야에 포진한 외국어고 출신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경기과학고 총동창회 총무인 오권용(吳權龍·6기) 씨는 “고교 때부터 연구와 실험이 몸에 배어 이공계 이외 분야에는 관심이 없고 개인주의적 성향도 강하다”고 말했다.
과학고가 18개로 늘면서 인재가 분산되는 데다 내신에서 불이익을 받는 점도 과학고 학맥을 좀 더 지켜 봐야 하는 이유다. 과학고 졸업생에게 적용되던 ‘비교 내신’이 1999년 입시부터 폐지되자 자퇴 파동이 일기도 했다.
이화여대 함인희(咸仁姬·사회학) 교수는 “과학고 출신들도 학교라는 틀을 통한 정체성과 연대의식을 갖고 있지만 전문직종 안에서만 권력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기존 명문고와 차별화된다”고 말했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이충환 동아사이언스 기자cosmos@donga.com
■ 非이공계 진출한 동문
과학고 출신 중에는 ‘엉뚱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이진원(李晋源·국악) 교수는 경기과학고(2기)를 졸업한 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이어 서울대 음악대학원에서 국악이론으로 석사학위를, 중국 중양(中央)음악학원에서 중국 전통 음악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땄다.
금융권에도 과학고 출신이 많다.
조흥투신 신동국(申東國) 대안투자1팀장은 경기과학고(1기)를 졸업한 뒤 KAIST에서 금융파생상품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삼성경제연구소, 삼성선물, 동원투신을 거쳐 2004년 10월부터 조흥투신에서 일하고 있다.
신 팀장은 “미국에도 이공계 출신 펀드매니저가 많다”며 “금융도 과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유리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삼성투신 허용(許鏞·경남과학고 1기) 선임은 한국과학기술대 생물학과를 마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했다. 1997년 제약담당 애널리스트로 신영증권에 입사했으며 현재 삼성투신에서 유통업과 미디어엔터테인먼트까지 맡고 있다.
미래에셋증권 구원회(具源會) 리스크관리본부장도 광주과학고(1기)와 과기대 물리학과를 나왔다.
종교계에 입문한 과학고 출신도 있다. 경기 양평군 용문성당의 배경석 신부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황권상 씨는 각각 경기과학고와 경남과학고 1기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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