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선택권 확대” “의료현실 무시”

  • 입력 2006년 1월 6일 03시 04분


콜록콜록.

자지러지는 아이를 볼 때마다 주부 조모(34) 씨는 안쓰럽기 그지없다. 조 씨는 그러나 동네 의원에 가기가 겁이 난다. 항생제 오·남용과 내성의 위험에 대해 여러 번 들었던 터라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찾은 병원. 이번에도 항생제가 처방전에 들어있었다. 조 씨는 불안해하면서도 고통스러워하는 아이 때문에 그냥 약을 먹일 수밖에 없었다.

감기에 대해 항생제 처방률이 높은 병·의원의 명단이 공개되면 조 씨는 원하는 의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은 처방률이 낮은 하위 25%의 명단만 공개됐지만 앞으로 모든 병·의원의 처방률 현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항생제 처방률이란 전체 감기약 중에서 항생제가 1개라도 들어간 비율을 뜻한다.

▽소비자 권리 커졌다=이번 판결로 무엇보다 소비자가 직접 병·의원을 고를 수 있게 됐다는 점이 눈에 띈다. 많은 사람이 항생제 처방률이 높은 병·의원을 꺼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상당수의 병·의원이 항생제 처방을 크게 줄일 것으로 보인다.

이번 소송을 제기한 참여연대도 이 점을 기대했다. 참여연대는 “항생제 남용 의료기관이 노출됨으로써 소비자의 의료선택권이 보장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환영했다.

신현호(申鉉昊) 의료전문 변호사는 “기준치 이상 항생제 사용 의료기관을 공개함으로써 해당 의료기관도 스스로 ‘자정’할 수밖에 없다”며 “결과적으로 병·의원에 대한 소비자의 선택권이 강화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의사들 반발=그러나 의사들은 이번 판결에 대해 의료현실을 무시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나아가 항생제 처방이 많아 오·남용과 내성이 생긴다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권용진(權容振) 의협 대변인은 “항생제 내성은 의사의 처방을 따르지 않고 중도에 약 복용을 중단한 환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며 “이번 판결은 국민에게 ‘항생제 처방을 많이 하면 부도덕한 병원’이란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권 대변인은 이어 “처방률만 공개될 경우 항생제 오·남용은 줄어들지 않고 의료서비스 품질만 떨어뜨릴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장훈(張勳) 소아과 원장도 “의사들이 소신에 따라 항생제를 써야 하는데 앞으로는 주변의 인식 때문에 선뜻 항생제를 처방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이날 판결과 관련해 “판결문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뒤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복지부는 그동안 의료기관의 환자 수 등을 고려한 객관적 평가지표가 없다는 이유로 공개를 하지 않았다.

▽항생제 오·남용 줄어들까=2000년 의약분업을 실시한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항생제 오·남용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항생제 오·남용 문제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 항생제 오·남용은 눈에 띄게 줄어들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신 변호사는 “소비자가 외면하기 때문에 의료기관도 어쩔 수 없이 스스로 항생제 처방을 줄여 자연스럽게 ‘간접규제’가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적극적으로 항생제를 요구하는 환자들도 자중해야 한다. ‘더 센’ 약을 원하는 소비자가 남아 있는 한 항생제의 오·남용은 근절되지 않는다는 것이 의료계 안팎의 지적이다.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 내성 줄이려면

항생제는 세균(박테리아)에 의한 감염이 생겼을 때 세균을 죽이거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쓰인다.

그러나 불필요한 항생제를 쓰는 경우 내성균이 생겨 점점 효과가 센 항생제를 사용해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내성이란 균이 항생물질에 죽지 않고 버티는 능력으로 내성률 80%는 그러한 균이 전체 80%에 이른다는 것이다. 내성균을 가지고 있는 환자의 경우 기침이나 신체접촉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염을 시키기 때문에 국민건강에 큰 위협이 된다.

1928년 세계 최초로 개발된 페니실린은 포도상구균, 폐렴구균 등 세균에 감염된 많은 환자를 살려내 기적의 약으로 불렸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페니실린에 내성균이 생기면서 이 약의 효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수많은 항생제가 개발됐지만 그때마다 내성균이 등장했다. 내성균의 발현을 억제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항생제를 오·남용하지 않는 것이다.

즉 감기와 같은 바이러스 질환의 감염치료를 위해서는 세균 감염치료에 사용하는 항생제를 쓰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단순감기라도 현실적으로 세균성 감기인지 바이러스성 감기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은 만큼 상당수 병의원에서 예방 차원에서 항생제를 사용한다.

삼성서울병원 감염내과 송재훈(宋在焄) 교수는 “항생제의 내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질환별로 적절한 항생제의 선택과 기간 등 사용법을 지켜야 한다”며 “또 가벼운 병조차 신약을 선호하는 경향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환자들도 의사에게 항생제를 처방해 줄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되고 처방에 따라 정확히 복용해야 한다.

환자가 자기 마음대로 항생제 복용을 중지할 경우 세균이 죽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해지는 내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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