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찬식]100년 私學의 시대정신

  • 입력 2006년 1월 11일 03시 04분


사립학교 중에서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는 학교가 여러 곳 있다. 동국대, 숙명여대, 진명여고, 휘문고, 중동고, 보성고, 송도고, 계성고가 차례로 ‘창학(創學) 100년’의 영예로운 순간을 맞는다.

이들 학교의 탄생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과 연관되어 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공식적으론 1910년의 일이지만 을사늑약 때 이미 나라를 빼앗긴 것과 다름없었다. 이때를 전후해 전국 각지에서 사립학교가 잇따라 생겨났다. 인재를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의 통제 아래 있는 관학(官學)은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전국에 3000여 개의 사학이 세워졌다. 사학들은 국민계몽과 함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앞장섰다. 조선이 망해 가는 과정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긴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사립학교들이 나라가 망한 것을 분통하게 여기는 내용의 교과서를 사용하므로 일본은 애국을 강조한 교과서를 모두 거두어 불태웠다’고 적혀 있다.

일제는 사학에 강력한 통제정책을 썼다.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사학의 씨를 뿌리고 가꿔 나간 노력은 10여 년 뒤 결실을 본다.

3·1운동의 주역은 학생들이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는 수만 명의 학생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간 시위대열의 선두에 섰다. 100년 전 암흑기에 민족 내부에서 형성된 사학 설립의 공감대는 대단한 통찰력과 혜안의 산물이었고 시대정신을 바로 읽은 것이다.

광복 이후 건국과 산업화 과정에서 사학은 또 한번 시대적 역할을 맡게 된다. 6·25전쟁 중에는 피란지에서 ‘천막학교’를 열어 위기에 대처했다. 전쟁이 끝난 뒤 베이비붐으로 학생이 폭발적으로 늘고 산업화에 따른 인력 수요가 급증했다. 빈궁한 나라에 학교시설은 턱 없이 부족했다. 그 공백을 메운 게 사학이다.

1955년 이후 10년간 해마다 70만 명씩, 많게는 100만 명의 신생아가 태어났다. 한 학급이 100명을 넘는 곳도 있어 ‘콩나물 교실’이란 말이 나왔다. 학교 수요가 급증하자 국가는 사학에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 또한 시대정신이다. 사학이 없었다면 교육 기회의 확대는 어려웠다. 경제발전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민주화도 교육 수준의 향상에 힘입은 바 크다. 사학이 비대해지면서 ‘부실 사학’ ‘비리 사학’의 문제가 발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학이 산업화, 민주화에 기여한 공(功)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교육은 국가발전의 동력이다. 선진국 최고 지도자들이 ‘교육 대통령’을 자청하고 나서는 것도 그래서다. 새로운 변혁기를 맞아 한국에도 다시 한번 ‘교육의 시대정신’을 꿰뚫어 보는 혜안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갈등을 빚고 있는 개정 사립학교법의 근본 문제는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옹졸함, 편협함이다. 통제와 지시 일변도로 사학을 획일적인 틀에 가둬 버렸다. 설령 이 법을 통해 학교가 깨끗해진다 해도 자율과 다양성의 가치를 통해 얻어지는 더 큰 열매는 포기해야 한다.

교육을 바라보는 이 정권의 시각은 1980년대 민주화투쟁 당시의 시계에 멈추어 있는 듯하다. 교육의 자율과 다양성이 중시되는 시대적 명제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공교육에 대한 국민의 강한 불만은 다양성 교육에 대한 욕구의 다른 표현이다.

사학이 반발하자 비리를 캐겠다고 나서고 종교계 사학은 ‘특별대우’하겠다는 정부의 태도는 너무나 낡은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직후 “탈(脫)권위, 탈권력이라는 시대정신을 잘 읽어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밝혔다. 이번엔 교육에서 시대정신이 어떤 것인지 따져 볼 차례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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