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후보들 안 왔나요”라는 이은희(李銀姬·여) 감시반장의 질문에 최길홍(64) 씨가 대뜸 “어따, 그 사람들 다 돈 많은데 없는 사람들 술 좀 사 주게 해 주지. 정부에서 그걸 막고 그래”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함께 술을 마시던 손순택(60) 씨가 “그 ×들 술 사 주고 당선되면 그거 다 도둑질하지”라며 최 씨를 말렸다. 이 반장이 “이제 조합장 선거도 선관위에서 관리하니까 소주 얻어 드시고 하면 50배로 물어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김모(66) 씨는 “눈깔사탕이나 하나 주면 좋겠다. 요즘은 그런 거 하나도 없어”라고 말했다.
지금 지방에서는 ‘조용한 선거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매번 과열 혼탁으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전국 농수축협과 산림조합장 선거가 몰라보게 깨끗해지고 있는 것. 각 조합법 개정에 따라 지난해 6월부터 중앙선관위가 조합장 선거를 위탁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전남 함평군 산림조합장 선거 이후 지금까지 선관위가 관리한 각종 조합장 선거는 모두 783곳(선거인 수 120만7759명)이다. 지난해 259곳이었고 올해는 1, 2월에만 524곳이나 된다.
지역조합장은 5000만 원 안팎의 연봉에 별도의 활동비가 지급되고 지역 기관장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이 때문에 과거 지역조합장 선거는 ‘차라리 직선제를 폐지하는 게 낫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매번 선거를 치르고 나면 후유증도 막심했다.
그러나 이제 적어도 노골적인 금품 살포만큼은 사라졌다는 것이 선관위와 조합 측의 공통된 평가다.
3일 치러질 예정인 전남 영암군 신북농협 조합장 선거에 출마한 최규근(崔圭根) 후보는 “요즘 같으면 조합장 선거도 할 만하다”고 말했다. 2002년 출마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해진 선거 분위기 때문이다.
“그때는 매일 저녁이면 20∼30명씩 찾아와 ‘저쪽 후보가 지금 지지자들에게 술을 사고 있다. 우리는 왜 아무 것도 안 하느냐’며 저녁을 사라고 했다. 심지어 그중에는 조합원이 아닌 사람도 있었다. 이제는 사 준다고 해도 다들 피한다. 걸리면 과태료를 50배나 내야 하니까.”
또 다른 후보인 이기우(李起雨) 씨는 “선관위의 선거 관리 때문에 출마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전에는 조합원들도 으레 향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돈 없이도 출마할 수 있게 됐다는 것.
7일 치러질 예정인 강원 강릉수협 조합장 선거에 출마한 윤영길(尹榮吉) 후보도 “여태까지 선거 때면 근처 식당에는 빈자리가 없었고 돈이 없는 사람은 사실상 조합장 선거에 나설 수가 없었다”며 “지금 분위기로만 선거가 치러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선관위의 선거 관리가 조합의 업무 수행에 도움이 될 거라는 평가도 있다.
부산시수협조합장에 당선된 임상봉(林相奉) 씨는 “그동안 지역에서는 신임 조합장이 선거 때 고발 들어온 것 때문에 2, 3년 동안 검찰이나 법원에 들락거리느라 일을 못하는 조합이 허다했다”고 말했다.
선관위 관계자는 “조합장 선거 같은 ‘생활 속의 선거’가 공직 선거보다 선거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며 “조합장 선거가 깨끗해지면 공직 선거에도 상당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개선돼야 할 문제점도 없지 않다. 공직선거와 달리 조합장 선거에서는 당선자 본인이 아닌 배우자나 사실상의 선거사무장이 부정 선거운동을 했을 경우에는 당선을 무효화할 수 없는 등 처벌이 느슨하다.
선거운동을 지나치게 제약하는 것도 바뀌어야 한다는 게 후보들의 지적이다. 선거사무실을 둘 수 없게 한 규정이나 배우자의 선거운동을 금지한 규정을 풀어야 한다는 것.
지난달 25일 치러진 제주 서귀포시 중문농협 조합장 선거에서 당선된 고남숙(高南淑) 씨는 “현행 조합법과 조합 정관에 따르면 전화와 인쇄물로만 선거운동을 할 수 있어 후보들이 유권자에게 자신을 알릴 기회가 없다”며 “적어도 합동연설회와 토론회는 허용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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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영암=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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