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모 시민단체의 토론회가 열린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
행사시간이 다가오자 회의장 입구 안내대가 있는 곳으로 깔끔한 정장 차림의 할아버지들이 속속 다가가 방명록에 사인을 하고 자료를 꼼꼼히 챙겨 행사장으로 향한다.
이미 자리를 잡은 노인들과 안면이 있는 듯 서로 눈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뒤쪽에 한 사람씩 자리를 잡고 앉는 이들은 회의장 분위기에도 꽤 익숙한 눈치다.
40여 명의 청중 사이에서 눈에 띄는 노인만도 족히 10명 이상. 토론회가 시작되자 이들은 돋보기를 꺼내 자료를 읽기도 하며 이내 발표자에게 집중한다.
○ 무료함 달래고… 친구도 사귀고…
행사장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이들을 주최 측과 관계된 손님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알고 보면 이들은 각종 세미나와 토론회가 열리는 한국 프레스센터 19층과 20층의 단골손님들이다.
이곳에서 청소를 담당하고 있는 박모(65) 씨는 “수년 전부터 이곳에 할아버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면서 “몇 시에 행사가 있는 지는 아마 이분들이 제일 잘 알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회의장에서 만난 김판석(가명·77·서울 서초구 서초동) 씨는 과거 교육계에 있었다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이젠 책상도, 의자도, 이름도 없지만 그래도 내가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탑골공원에 가 우두커니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으냐”며 “아침에 집에서 나와 이곳과 세종문화회관을 다니며 하루종일 소일한다”고 했다.
냉난방 시설이 있는 곳에서 유명한 강사의 강연까지 귀동냥으로 들을 수 있어 일주일에 서너 번은 다녀간다는 오대수(가명·78·서울 구로구 오류동) 씨는 “우리 같은 늙은이들을 환영하는 곳이 어디 그렇게 있겠느냐”며 갈 곳 없는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
노인 중에는 더러 손을 들고 질문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들의 주 목적은 시간 보내기와 함께 개방형으로 준비된 다과 때문. 행사가 끝난 뒤 종종 제공되는 리셉션 음식은 할아버지들에게 하루를 마감하는 기분 좋은 만찬이 되기도 한다.
호남대 김기태(신문방송학) 교수는 “양복차림에 방명록에 사인을 하고 꼼꼼히 발제문을 읽는 모습에서 행사 주최 측에 대한 노인분들의 배려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 ‘식자층’ 할아버지들이 마땅히 갈 곳이 없어 한국프레스센터나 세종문화회관 등에서 열리는 세미나를 찾고 있다”며 “이들이 다른 데서 소일거리를 찾지 못하는 한 이 같은 현상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 노후 여가생활 준비는 중년부터 차근차근
3년 전부터 남편과 동네 자치센터에서 운영하는 ‘부부댄스’강좌를 수강하고 있는 한춘자(64·경기 성남시 분당구) 씨. 지금은 남편이 자신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활기찬 생활을 하고 있지만 남편이 퇴직하던 5년 전만 해도 정말 막막했다고 말한다.
“처음엔 남편이 노래하는 걸 좋아 해 노래교실 문을 두드려 보았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온통 여자들이라 등록하란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부부가 함께할 수 있는 취미를 찾게 된 거죠.”
현대백화점 목동점 문화센터 측은 “모든 성인 강좌는 남녀 구분 없이 신청 받고 있지만 실버 수강생들은 대부분 여성들”이라며 “할머니들은 친구 분끼리 같이 와 신청하는 사람이 많지만 할아버지들은 혼자 오셨다가 여자들만 있는 걸 보고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노인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경로당도 할아버지들의 여가 장소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한남대 임춘식(사회복지학) 교수가 협성대 이근홍(사회복지학) 교수와 함께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서울시내 65세 이상 노인인구의 경로당 이용률은 20% 미만이었으며 경로당을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로 노인들은 ‘다양한 프로그램이 없기 때문(37.5%)’이라고 꼽았다.
임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 노인들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방황’하고 있는 수준”이라며 “특히 젊은시절 한번도 제대로 여가라는 것을 즐겨본 경험이 없고 오랜 세월 가정 일에조차 무관심했던 남성 노인들은 이제 표류하면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실정”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노후대책을 위해 다달이 연금을 내듯 남성들 자신도 중년부터는 노후 취미생활에 대한 시간적 투자를 차곡차곡 해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완정 사외기자 tyra21@naver.com
▼일산노인복지관에 가보니▼
“새롭게 변신한 노인복지관에 가면 하루가 짧아요.”
하루 대여섯 시간을 집 근처 일산노인종합복지관에서 보내는 한일동(76·경기 고양시 화정동) 씨는 복지관 예찬론자. 한 씨는 매일 아침 복지관으로 나와 오전 강좌를 듣고 복지관 식당에서 친구들과 점심식사를 한 뒤 오후 3시 정도까지 이어지는 오후수업을 마친 뒤에야 집으로 향한다.
“집에 있어도 마땅히 말 건넬 사람도 없어 무료하기만 했는데 여기 나오고부터는 아주 생활이 즐거워졌지. 점심도 1500원인데 찬이 네 가지나 나올 정도로 썩 괜찮아.”
한 씨가 복지관에서 수강하는 총 10개의 프로그램 중 그가 특히 애착을 갖고 있는 강좌는 ‘신문 일본어’강좌. 강사를 포함해 수강생의 평균 연령이 75세일 정도로 회원들의 연령대가 높아 수준도 비슷하고 할아버지 수강생들이 많아 말도 잘 통하기 때문이다.
최정(78) 강사는 “집에서 쉬고 있어도 사회생활을 하던 남자들은 지적인 활동에 대한 욕구가 있기 마련”이라며 “이 강좌가 시사적인 문제를 다루다보니 노인 수강생들에게 인기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1년 동안 일본어를 수강한 뒤에야 이 반에 합류할 수 있었다는 이종덕(72· 경기 고양시 마두동) 씨는 “이곳에서 수업 듣는 시간은 일주일에 총 3시간이지만 수업준비를 위해 하루 두 시간 이상은 책과 씨름하며 지내기 때문에 하루가 바쁘게 지나간다”고 말했다.
이 밖에 2년제 4학기 과정의 ‘복지문화 대학원’ 강좌는 전현직 교수들을 강사로 초빙해 생활경제, 역사, 문화, 정치 등 보다 전문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대학원 수강료는 월 1만 원.
이 복지관 유수길 사회복지사는 “은퇴자가 많고 학력수준이 높다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해 이에 맞는 다양한 강좌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031-919-8677
박완정 사외기자 tyra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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