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관계자들은 낮에는 박 씨의 사무실로 내부 자료를 들고 가 ‘브리핑’을 해야 했고, 밤에는 고급 술집으로 불려가 술값을 대신 내야 했다.
▽기업은 시민단체의 봉?=박 씨는 소비자 권익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기업 관련 의혹을 제기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정상적인 시민단체와 달리 관계 당국에 고발하는 등 조치를 취하지 않고 주로 방송사를 활용했다. 그가 시민단체 활동 과정에서 친분을 쌓은 몇몇 방송사 기자들은 결과적으로 박 씨의 범죄에 들러리를 서 준 꼴이 됐다.
‘교통시민연합’이란 시민단체를 만들어 소장 직을 맡은 박 씨는 건설업체인 W사가 1999년 서울지하철공사와 체결한 납품계약이 수의계약으로 이뤄졌다는 얘기를 듣고 2001년 10월 W사에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W사 부사장과 서울지하철공사 팀장 2명이 이 단체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박 씨는 이들에게 “서로 짜고 해 먹은 것 아니냐. 이실직고해라”고 소리쳤다. 이 계약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그는 W사 부사장 등을 서울 강남의 고급 술집으로 데리고 가 술값 300만 원을 내도록 했다.
며칠 뒤 박 씨는 다시 이 술집으로 W사 대표 김모 씨 등을 불러내 협박했다. 김 씨는 사업 차질을 우려해 “지하철공사 사람들이 죽겠다고 하는데 까놓고 얘기하자. 원하는 게 뭐냐”고 말했다. 박 씨는 돈을 요구했고 W사는 더는 문제 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5000만 원을 건넸다.
▽P사 관련 보도는 박 씨 작품?=2004년 교통시민연합을 ‘시민연대21’로 바꿔 사무총장을 맡은 박 씨는 본격적으로 일을 벌였다.
2004년 8월 20일 박 씨는 식품업체 P사의 유기농산물 광고를 문제 삼으며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자료를 들고 사무실을 찾은 P사 간부들에게 박 씨는 “중국에서 수입한 콩은 광고와 달리 농약과 화학비료로 재배해 유기농 콩이 아니라는 중국 농민의 증언 등을 B방송사 오모 기자와 같이 취재했다”고 겁을 줬다.
같은 달 30일 박 씨는 이 회사 김모 본부장을 강남의 고급 술집으로 불러냈다. 그 자리에는 A, B 방송사 기자 2명이 합석했다. 김 본부장은 술값 220만 원을 냈다.
박 씨는 같은 해 9월 3일 자신의 사무실을 찾아온 김 본부장에게 유기농 식품에 대한 조사 활동비 1억5000만 원을 협찬해 달라고 요구했다. 김 본부장이 영수증 처리를 통해 근거를 남기려 하자 박 씨는 이를 포기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박 씨는 같은 해 10월 16일 다시 김 본부장을 사무실로 불러내 협박했다. 그는 언론 제보, 검찰 고발, 집단 소송 등을 들먹였다.
이틀 뒤 박 씨는 김 본부장을 강남의 고급 술집으로 데려가 5억 원을 협찬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날 술값 185만 원도 김 본부장이 냈다. P사 측은 이번에도 정식 계약 체결을 요구하는 바람에 박 씨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1주일 뒤 A방송사는 박 씨의 제보를 토대로 P사 관련 의혹을 보도했고, B방송사도 며칠 뒤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당시 A방송사 측은 시민연대21의 제보로 보도했다고 밝혔으나 시민연대21은 이를 부인했다.
시민단체가 기업에 협찬을 요구하고, 검증되지 않은 내용을 언론을 통해 폭로하는 게 적절한지 등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A방송사의 보도 직후 P사의 주가는 폭락했고 A방송사는 같은 해 11월 P사의 입장을 담은 반론보도를 했다.
▽수배 중에도 범죄 행각 계속=경찰은 2004년 12월 수사에 나서 박 씨를 지명 수배했다. 박 씨는 도피 생활을 하면서도 ‘권리찾기시민연대’라는 시민단체 사무처장 행세를 하고 다녔다. 시민연대21의 간판을 내리고 같이 활동하던 인사들을 이끌고 이 단체로 무대를 옮긴 것.
박 씨는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강남지역 사설 입시학원의 광고를 문제 삼아 이들 학원에서 3500만 원을 기부금 명목으로 받아 챙겼다. 한 학원 대표에게는 공정거래위원회나 교육청에 제보하겠다고 협박해 강남 고급 주점에서 250만 원어치의 술을 접대받기도 했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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