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한 조남철 9단…현대바둑 터닦은 ‘반상의 개척자’

  • 입력 2006년 7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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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조치훈과 대국조남철 9단이 1962년 친조카인 조치훈(당시 6세)이 일본으로 유학 가기 직전 기념대국을 벌이고 있다. 사진 제공 한국기원
소년 조치훈과 대국
조남철 9단이 1962년 친조카인 조치훈(당시 6세)이 일본으로 유학 가기 직전 기념대국을 벌이고 있다. 사진 제공 한국기원
“이 사람아, 그 대마는 조남철이 와도 못 살리네. 돌을 던지게.”

1970년대 중반까지 동네 기원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조남철’이란 이름은 곧 ‘최고수’로 통했다.

조남철 9단이 이런 대접을 받은 것은 그가 한국 현대바둑의 개척자이자 당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실력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광복 후 한국기원 창립, 프로기사 제도 도입, 최초의 정규 기전인 국수전 창설 등 한국 바둑사는 그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조 9단은 2004년 발간된 ‘조남철 회고록’에서 “바둑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일념뿐이었다”고 술회했다. 생전에 그는 “나는 평생 세 번 울었다. 일본 유학 시절 나라 없는 설움을 느꼈을 때, 6·25전쟁 와중에 운영하던 기원이 폭격에 무너져 내렸을 때, 1967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한국기원을 세웠을 때”였다고 말할 만큼 ‘바둑 입국’에 대한 의지를 갖고 이를 실천했다.

그는 1937년 14세에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떠나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9단 문하에 들어갔고 18세에 입단한 뒤 1944년 귀국했다. 귀국 직후인 1945년 서울 중구 남산동에 한국기원의 전신인 한성기원을 세우면서 ‘국제 경기에 대비해 순장바둑을 폐지하고 현대바둑으로 대체한다’ ‘내기바둑을 금하고 건전한 국민 오락으로 보급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1950년에는 최초의 단위(段位) 결정 경기를 열어 13명의 초단 기사를 배출하는 등 프로기사 제도를 확립했고 1956년에는 국수전 창립에도 참여했다.

그의 또 다른 공로는 후진 양성에 기여한 것. 김인 윤기현 하찬석 조훈현 9단 등 재능 있는 기사들의 일본 유학을 주선해 한국바둑의 실력을 비약적으로 키웠다. 그의 집안에서만도 일본에서 활약하는 친조카 조치훈 9단과 큰형의 외손자인 최규병 9단, 이성재 7단이 나왔다.

일본 바둑책의 번역판이 나돌던 시절 ‘바둑개론’(1954년)을 시작으로 ‘행마의 기초’ ‘포석의 요령’ 등 27권의 책을 펴내 아마추어 바둑 팬들의 갈증을 푼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공이다. 그는 ‘바둑은 모양이 좋아야 한다’ ‘거북등 빵때림’ ‘쌈지뜨면 지니 대해로 나가라’ 등 어지간한 바둑 애호가라면 금언으로 외우는 말들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바둑 보급과 후진 양성에 앞장서느라 정작 자신의 공부를 위한 시간을 내기는 힘들었다. 1966년 국수 자리를 후배 김인 9단에게 빼앗기자 “이제 내 공부를 해야겠다”고 말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도전기에서 활약했지만 1972년 서봉수 9단에게 명인위를 빼앗긴 뒤엔 다시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1994년 71세의 나이로 국기전 본선에 올라 최고령 본선 진출 기록을 세우는 등 현장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조 9단의 통산 전적은 460승 486패.

그는 1983년 뒤늦게 9단에 승단했고 1989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별세할 때까지 한국기원 명예이사장을 맡았다.

조 9단의 제자인 고재희 7단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을 만큼 명예를 중시하던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국수전 산파역… 9년 연속우승 ‘전설’

■ 조남철과 국수전

조남철 9단은 국내 기전의 효시인 국수전 탄생의 산파역을 맡았다. 1950년 프로기사 제도가 도입됐지만 기사들이 활약할 정규 기전이 없자 동아일보사와 손잡고 국수전의 전신이자 국내 최초의 기전인 ‘국수 1위전’을 1956년 창설한 것. 고인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국수전 창설 이후 신문에 정기적으로 기보가 실리면서 바둑 보급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며 “이후 서울신문 패왕전(1959년), 부산일보 최고위전(1960년) 등 신문 기전이 경쟁적으로 생겼다”고 밝혔다.

1기 ‘국수 1위전’은 16명의 기사가 각축을 벌인 끝에 조 9단이 전승으로 우승했다.

2기 국수 1위전에선 민영현 2단이 도전자가 됐으나 조 9단은 4연승을 거두며 우승을 일찌감치 확정지었다. 특히 민 2단과의 도전 1국의 경우 대국 당일 바둑 수순을 KBS라디오로 생중계하는 파격적 이벤트로 화제를 모았다.

조 9단은 이어 김인 이창세 윤기현 등 젊은 기사들의 도전도 모조리 막아 내며 9연패를 달성했다. 김인 9단은 1962년 도전기에서 1승 1무 3패로 조 9단에게 패한 뒤 기력 연마를 위해 절치부심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조 9단은 마침내 1966년 10기 국수 1위전 도전 5번기에서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배 김 9단에게 1승 3패로 패해 타이틀을 넘겨줬다. 국수전 9연패의 대장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동아일보사는 1995년 조 9단에게 ‘명예 국수’ 칭호를 수여했다. ‘명예 국수’는 조 9단이 유일하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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