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토리라인
방송국 기자 아사가와는 학생들 사이에 떠도는 괴담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어떤 비디오테이프를 보면 일주일 후 죽게 된다는 소문이죠. 취재 중이던 아사가와는 조카 도모코가 심장마비로 처참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도모코가 문제의 비디오를 본 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사가와는 이혼한 전 남편 류지와 함께 비디오테이프를 찾아 나서죠.
마침내 테이프를 찾아낸 아사가와. 그녀는 테이프가 카메라로 촬영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을 통해 염사(念寫·마음으로 대상을 생각한 것만으로도 그 대상을 찍어낸다는 심령현상)된 것이고 염사를 한 장본인은 사다코라는 초능력을 지닌 여자아이였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테이프를 본 아사가와와 류지에게도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지만, 두 사람은 사다코가 비운의 삶을 마감한 우물을 찾아 사다코의 시신을 찾아낸 뒤 저주를 풀어줍니다.
하지만 이게 웬일입니까. 아사가와는 죽음을 벗어나지만 류지는 TV 밖으로 튀어나온 사다코의 모습에 놀라 심장마비로 죽게 됩니다. 도대체 아사가와는 살아나고 류지는 죽게 된 이유는 무엇이기에….
[2] 주제 및 키워드
공포영화에도 숨은 뜻이 있을까요? 이 영화는 특정 비디오테이프를 본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인데 말이죠. 하지만 답은 늘 가까이에 있어요. ‘링’의 주제는 말 그대로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죽음이 전달되는 현상’ 그 자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까요.
저주의 비디오테이프가 맨 처음 만들어진 이유는 이렇죠. 한 아이가 자신이 늘 보던 TV 프로그램을 비디오로 예약 녹화하는 과정에서 채널이 잘못 설정되는 바람에 죽음의 메시지가 녹화됩니다. 그리고 이 녹화테이프가 유포되면서 죽음이 전파되었던 거고요. 즉, 죽음이 TV 전파를 타고 언제 어디로든 전해진다는 점과 죽음이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무차별 확산된다는 점은 영화의 핵심 설정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숨은 뜻을 간파해낼 수 있죠. 첫째는 TV로 대표되는 매스미디어(대중매체)가 보는 이의 심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비디오테이프로 상징되는 대중 영상문화가 죽음만큼이나 무섭고 두려운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죠.
결국 TV 브라운관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사다코의 끔찍한 모습은 단순한 ‘귀신’이 아니라, 매스미디어와 영상문화가 현대인에게 미칠지도 모르는 무시무시한 폐해에 대한 일종의 은유(隱喩)였던 셈이죠.
많은 경우 공포영화들은 ‘시대’를 반영해요. 특정 시대, 특정 집단이 지닌 뿌리 깊은 공포가 반영되기도 한다는 말이죠. ‘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링’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어요. ‘왜 하필 이런 비디오 괴담은 고교생 집단에서 집중적으로 확산되는 걸까.’
알고 보면, ‘링’에는 이 영화가 제작된 1999년, 즉 1990년대 말 일본 고교생 집단이 느끼고 있는 집단적인 공포가 깃들어 있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영화 초반, 저주의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본 남녀 고교생들은 이성 간 데이트를 즐기려는 순간 끔찍한 죽음을 맞아요. TV와 비디오테이프, 그리고 이성교제라…. 이 세 가지는 시험과 성적이 최우선시되는 억압된 삶을 사는 고교생들에게는 참 유혹적인 대상이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대상이기도 하죠.
그렇습니다. ‘링’에는 TV와 비디오도 보고 싶고 이성교제도 하고 싶지만 이런 욕망을 이겨내야만 하는 고교생 집단의 히스테리(비정상적인 흥분상태)가 절묘하게 숨어있었던 것이죠.
[4] 뒤집어 생각하기
‘링’의 마지막 장면을 볼까요. 아사가와와 류지는 둘 다 비디오를 보았지만, 아사가와는 살아나고 류지는 죽어요. 왜 그럴까요? 죽음의 비디오테이프를 복사해서 남에게 보여 줄 경우 자신(아사가와)은 살고 복사 테이프를 본 타인(류지)은 죽기 때문이죠.
이 대목은 한 번 더 우리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마치 복사기를 통해 똑같은 서류를 끊임없이 찍어내듯이 ‘죽음’이라는 것도 끊임없이 ‘복제(copy)’될 수 있다는 주장이 담겨 있는 것이니까요.
‘복제’라는 게 뭔가요. ‘대량생산’의 상징과 같은 단어죠. 비디오테이프가 수도 없이 복사되듯이,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대상도 공장에서 마구 찍어내는 꽁치 통조림처럼 대량 생산·복제·유통될 수 있다는 엄청난 주장을 이 영화는 담고 있었던 것이죠. 즉, 죽음도 무슨 운동화 같은 물건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통해 ‘링’은 무엇이든 ‘물건’처럼 보고 느끼고 대하는 자본주의 사회 속 ‘물신주의(物神主義·물질적인 것을 숭상하는 주의)’를 따끔하게 꼬집고 있어요.
[5] 내 생각 말하기
‘죽음’이란 건 유일해요.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 외에는 누구도 대신 경험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니까요. 하지만 ‘링’은 죽음도 무차별 복제될 수 있다는 획기적인 주장을 담고 있어요.
아날로그 방식의 비디오테이프를 통해서도 원혼(寃魂·원통하게 죽은 사람의 넋)이 복제된다면, 디지털 방식의 파일 복사를 통해선 또 어떨까요? 원혼은 한 치의 다름도 없이 고스란히 복제되고 옮겨질 거예요. 만약 이런 세상이 정말로 온다면, ‘원본’이 갖는 ‘유일성’이나 ‘독창성’이란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이성친구에 대한 사랑의 감정마저 고스란히 대량 복제될 수 있다면, 내가 느끼는 사랑이 과연 유일하고 특별하고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디지털 시대에 ‘원본’은 유의미할까요, 아니면 무의미할까요.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철학적이고 논리적으로 펼쳐 보는 게 오늘의 문제입니다.☞정답은 다음 온라인 강의에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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