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은 평생 일궈 온 논과 밭, 그들의 유일한 재산인 집과 가축들이 수마(水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6일 오후 강원 인제군 북면 한계리. 한계천 다리가 폭우로 무너져 내리면서 고립된 한계천 너머 한계2리 주민 25명이 로프에 매달려 구조됐다. 하지만 이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살았다는 기쁨보다는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날려 버린 허탈감에 고개를 숙였다.
“내 소들을 데려와야 해. 나한텐 그놈들밖에 없어. 나 좀 다시 데려가 줘….”
70대로 보이는 한 할머니는 수몰지역에 두고 온 소 2마리를 데려와야 한다며 119 구조대에 자신을 다시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울부짖었다.
한계2리 15채, 23가구가 고립된 것은 15일 오전 10시경. 한계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폭격을 맞은 듯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다리는 상류에서 떠내려 온 거목이 가로막으면서 댐처럼 엄청난 양의 물을 담고 있다가 수압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됐다.
강변에 사는 이영근(48) 씨는 “강에 물이 차올라 아내와 딸을 데리고 산 쪽으로 대피했는데 불과 몇 분 만에 집이 휩쓸려 내려갔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민 이희찬(48) 씨는 “다리가 무너지자 순식간에 물이 어른 목까지 차올랐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 지역 주민 대부분이 노인들이라 대피하는 데 더딜 수밖에 없었다. 이희찬 씨는 직접 물살을 헤치고 고립된 노인들을 찾아 산기슭에 있는 백은녀(47·여) 씨의 집으로 대피시켰다.
5개월째 뇌중풍을 앓고 있는 박진구(70) 씨도 이 씨의 도움으로 간신히 대피했다. 박 씨의 부인 노옥년(66) 씨는 15일 오전 식당일을 나가 박 씨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노 씨는 구조된 박 씨를 보고서야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주민들은 이 씨가 아니었다면 마을 노인 중 상당수가 참변을 당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계2리 주민 이정규(50) 씨는 “15일 오전 10시경 군청에 신고를 했는데 오후 3시가 다 돼서야 공무원들이 나타났다”며 “한계3리는 우리보다 상황이 더욱 좋지 않다는데 군청에서 늑장 대응을 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한계2리 마을회관에 마련된 상황실은 한계3리 주민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외지에서 찾아온 가족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119구조대원 100여 명은 16일 오전 산을 넘어 한계3리에 접근한 뒤 대피해 있는 주민들에게 로프로 식량을 전달했으나 물살이 워낙 거세 구조작업을 벌이지 못했다.
서울에서 동해로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가던 박영환(46) 씨 등 일행 6명은 15일 폭우를 피해 한계3리 민박촌에 들렀다가 민박촌이 물에 잠기자 16일 오전 9시경 유실된 도로와 산기슭을 따라 대피했다.
한계3리에 사는 이전혁(78), 전광난(67·여) 씨 부부의 딸 이영자(50) 씨는 “15일 오전 아버지가 ‘방문을 열 수 없을 정도로 마당에 물이 차올랐다’고 말한 것이 마지막 통화”라며 “워낙 금실이 좋은 분이라 한날한시에 저세상으로 가신 것 같다”고 울먹였다.
서울에서 온 이영미(39·여) 씨는 한계3리에 고립됐던 아버지 이희옥(67) 씨가 16일 오후 7시 반경 119구조대의 들것에 실려 구조돼 한계2리로 나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어머니 최강순(69·여) 씨가 보이지 않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부러진 아버지 이 씨는 구조대에 의해 가까스로 구조됐지만 어머니 최 씨는 이미 급류에 휩쓸려 사라진 뒤였다.
한계3리에선 이전혁 씨 부부와 최강순 씨를 비롯해 5명이 실종되고 송어장 인근에서 관광객으로 추정되는 시신 한 구가 발견됐다.
119구조대 관계자는 “한계3리 주민 30여 명과 관광객 120여 명이 한계천 상류지역에 대피해 있는데 산세가 워낙 험해 17일 오전 날씨가 개면 헬기로, 그렇지 않으면 산길을 통해 이들을 구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인제=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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