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철강공단에 있는 포스코 본사는 딱딱한 느낌을 주는 포항제철소와는 달리 숲으로 둘러싸여 마치 공원 같은 분위기를 자랑해 왔다. 그러나 노조원들이 장기간 점거농성을 벌이면서 쳐다보기조차 싫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노조원 800여 명이 점거하고 있는 건물 5∼12층의 유리창 곳곳은 깨졌거나 ‘죽여라’ 등의 격문이 붙어 있었다. 건물 주변은 오물과 쓰레기로 뒤덮여 악취를 뿜어냈다.
노조원들은 쓰레기와 분뇨, 물을 담은 플라스틱 음료병, 건물 벽에서 떼어낸 돌조각을 바깥으로 내던지며 투쟁 의지를 불태워 왔다.
점거가 장기화되면서 현재 노조원 900여 명이 밖으로 이탈했다. 이탈자가 간간이 생기고 있지만 지도부와 선봉대 등 400여 명이 문제다. 이들은 16일 5층으로 진입하려던 전경에게 LP가스통으로 불을 붙여 공격해 전경 7명에게 화상을 입힐 정도로 과격했다.
이탈자들은 “농성 노조원들은 사무실의 녹차잎을 말아 담배를 피우고, 생라면을 먹은 탓에 설사를 많이 하면서도 최후의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19일 민주노총 영남권 노조원 5000여 명이 포항시내에서 거리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는 상인들과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가기도 했다.
상인들은 시위대와 욕설을 주고받으면서 “장사 좀 하게 시위를 제발 멈춰라”고 요구했고, 쇠파이프를 든 노조원들은 “장사하고 싶으면 입 닫아라”고 위협했다. 상인들은 “경찰이 빼앗은 쇠파이프가 산더미였다. 대낮에 이런 무법천지가 벌어지는 대한민국이 도대체 법치국가냐”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노조 지도부는 노조원의 파업 결속력을 높이기 위해 불참 시 강력히 징계하는 지침을 마련해 놓았다. 동참하지 않으면 제명하고, 참가 일수가 적으면 조합원 자격을 정지시키는 등 6등급의 징계로 족쇄를 채워 놓았다.
이번 사태로 가장 가슴 졸이는 쪽은 노조와 경찰, 포스코 직원도 아닌 시민이다.
노조는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경찰은 해산이나 진압을, 포스코 직원은 회사의 정상화를 걱정하지만 시민은 ‘포항’을 염려하고 있다.
포항의 바닥 민심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동해안 최대 재래시장인 죽도시장. 상인들의 우려는 상상을 넘었다. 상인들은 가게 앞에 삼삼오오 모여 “포스코 사태에다 장마도 길어져 불안하기 짝이 없다”며 오지도 않는 손님을 기다렸다.
죽도어시장번영회 박세영(56) 회장은 “포스코에 왔다가 죽도시장에 들러 회를 먹거나 사 가는 사람이 많은데 이번 사태로 발길이 뚝 끊겼다”며 “장사도 장사지만 포항 이미지가 너무 나빠져 외지 손님이 외면할까 봐 여간 걱정스러운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포항제철소 부근 식당에도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점거 이후 포스코를 비롯해 철강공단 업체들의 회식이 사라졌기 때문. 한 식당 주인은 “철강공단 직원들이 가장 큰 손님인데 망하게 생겼다”며 “건설노조원도 나름대로 입장이 있겠지만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지역 기업인들은 이번 사태로 포항이 가장 기업하기 어려운 곳으로 낙인찍히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포항 경제의 상징인 포스코가 점거되는 과격한 모습이 전국에 알려진 것은 치명적이라는 게 상공인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포항상공회의소 최영우(62) 회장은 “포항의 인구가 최근 5년 새 1만 명가량 감소한 것은 일자리 부족 등 경제적 이유가 가장 크다”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은 데다 상당 기간 지속될 후유증을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포스코는 설비 공사가 지연돼 매일 100억여 원의 손실을 보고 있다. 올해 말 완공 예정인 첨단 파이넥스로(爐) 건설에도 차질이 빚어지면서 대외 신인도 하락이 우려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민주노총은 22일 포항에서 대규모 시위를 열 예정이어서 포항은 파국의 먹구름으로 덮이고 있다.
포항=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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