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우리학교 논술 수업]서울 동북고의 ‘독특한 수업’

  • 입력 2006년 8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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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강방식(윤리) 권영부(경제) 윤석우(철학) 강현식(물리) 임영태(국어) 교사. 김재명 기자
왼쪽부터 강방식(윤리) 권영부(경제) 윤석우(철학) 강현식(물리) 임영태(국어) 교사. 김재명 기자
《2008학년도 입시부터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주요 대학이 도입하는 통합교과형 논술을 두고 일선 교사들이 난감해하고 있다. 마땅한 교재나 교수법이 없는 상황에서 여러 과목을 넘나드는 논술 강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여간 고민이 큰 게 아니다. ‘이지논술’은 나름의 방식으로 알차게 논술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공교육 현장을 격주 시리즈로 소개한다.》

21일 오후 서울 동북고 3학년 4반 교실에서는 학생 16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이한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학교 ‘통합교과형 논술수업’ 2학기 첫 시간. 경제 담당 권영부 교사가 “지식, 창조성, 표현력이 통합논술의 핵심”이라며 ‘변화한 세상이 요구하는 인재상’을 곁들여 통합교과형 논술의 의미를 설명했다.

20분가량 진행된 권 교사의 강의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무렵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권 교사는 마치 릴레이 경주에서 스타트 라인을 치고 나간 선수가 다음 선수에게 바통을 넘겨주듯 말했다.

“자, 그럼 지금까지 설명한 통합교과 논술에 관한 이해를 실제 사례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강 선생님, 나와 주세요.”

교실 뒷자리에는 이 학교 강방식(윤리) 윤석우(철학) 강현식(물리) 임영태(국어) 교사가 앉아 있었다. 강 교사가 교단으로 나왔다. ‘바통 터치’ 순간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강 교사는 최근 논문 표절 및 중복 게재 논란으로 사퇴한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를 예로 들면서 릴레이 강의에 들어갔다.

“김 전 부총리는 대학교수 시절 논문을 표절하고 중복 게재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건 학계의 관행이었다’는 반론을 폈습니다.”

그러면서 강 교사는 학생들에게 고1 수학교과서를 펼쳐 보였다.

“여러분은 이미 ‘프랙탈과 복소수’ 부분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혹시 아십니까? 김 전 총리가 폈던 반론은 바로 이 ‘프랙탈 이론’과 닮아 있다는 사실을….”

강 교사는 칠판에 정삼각형의 한 변을 삼등분해 작은 정삼각형, 그리고 또 그 작은 정삼각형의 한 변을 삼등분해 더 작은 정삼각형을 그리는 방식으로 수없이 작은 정삼각형을 그려 갔다.

“김 전 부총리는 ‘자신’이라는 ‘부분’이 ‘학계’라는 ‘전체’와 같은 모양새를 띠고 있다는 주장을 펼친 것입니다. 자신이나 학계 전체나 논문을 표절하거나 중복 게재하는데 있어서 같은 ‘모양새’라는 거죠. 이런 주장은 ‘부분의 모양은 전체 모양의 패턴을 무한히 반복한다’는 프랙탈 이론과 흡사한 것입니다.”

강의를 듣고 있던 3학년 4반 신동환 군의 입이 딱 벌어졌다.

동북고 교사 5명은 지난해 2학기부터 릴레이식 집단 강의를 통해 ‘통합교과형 논술’을 지도하고 있다. 이날 수업 내용은 이들 교사가 여름방학 중 모여 토론을 통해 다듬고 정리한 것. 중고교 수학교과서를 살펴보던 강 교사가 “프랙탈 이론을 김 전 부총리 사태와 관련 지어 설명하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고 토론 끝에 수업 내용과 접근 방식, 강의 순서 등이 정해졌다.

교사들의 릴레이 강의가 끝나면 마지막으로 철학과목을 담당하는 윤석우 교사가 수업에 동원된 각 과목의 이론을 소개하면서 이론들이 연결되는 논리적인 연결고리를 다시 한번 정리해 준다. 학생들이 질문하는 내용에 따라 해당 교사가 나와 답변을 한다. 이런 과정이 끝나면 학생들은 주어진 논제에 대해 글을 쓰고, 교사들의 첨삭 지도를 받는다.

동북고의 통합교과 논술 강의는 당초 1999년 시작된 교사들 간 독서토론 모임에서 싹텄다. 역사 문학 수리 과학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책을 읽고 각자의 시각에서 토론하다 보니 자연스레 통합교과형 수업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한다. 수업은 학년별로 20명의 신청을 받아 1주일에 두 차례 총 20시간 강의하는 프로그램으로 진행되고 있다.

강의모임을 이끌고 있는 권영부 교사는 “우리 교사들이 이런 선행적인 강의방식에 시동을 건 것은 통합교과형 논술 강의야말로 공교육의 틀 안에서 충분히 가능하다는 확신 때문이었다”면서 “다양한 분야에 종합적인 관심을 가지면서 교과 사이의 벽을 스스로 허물겠다는 교사들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강방식 교사는 “통합교과형 논술이라고 하면 일부 상위권 대학에 가려는 학생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라고들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며 “진정한 통합교과란 모든 교사가 각자 자신의 수업에서도 통합교과적인 마인드를 지니고 수업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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