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9년, 십자군 전쟁에 나섰던 병사들은 지리 감각이 전혀 없었다. 유럽의 마을을 지날 때마다 “여기가 예루살렘이냐?”고 물을 정도였다. 하긴, 당시의 지도는 ‘만화’에 가까웠으니 그럴 만도 했다. 흔히 ‘T-O지도’라고 하는 그 시절 지도에서 세상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다. 동쪽 끝에 에덴동산이 있고, 다뉴브 강 중간 즈음에서 지중해가 만나 세상을 십자가처럼 셋으로 나누어 놓았다. 콜럼버스의 지리에 대한 지식도 이보다 나을 게 없어서, 남미 오리노코 강 어귀를 낙원의 입구라고 착각했다고 한다.
그보다 1000년 전에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고 현대에도 쓰이는 투사법을 써서 지형을 그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왜 서양지도의 수준은 이후 한참 뒤떨어지고 말았을까?
지도란 땅의 모양을 있는 그대로 옮긴 그림이 아니다. 항공사진은 지상의 모습을 꼭 같이 보여주지만, 누구도 이를 ‘지도’라고 하지 않는다. 지도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뽑아서 보여준다. 도로지도는 도로를, 지형도는 땅의 높낮이를 알려주는 식이다. 지도는 우리의 관심에 따라 정리된 세상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십자군 전쟁 때의 지도가 왜 그리 엉터리였는지도 자연스레 이해가 된다. 그네들은 지도를 통해 세상이 기독교 성경의 모습대로 만들어졌음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여행 목적으로 지도를 만들려고 했다면, 차라리 ‘물어물어 길 찾기’가 더 나았을 터다. 이동이 드물던 시절이라, 다른 나라를 제대로 알고 지도를 그릴 수 있는 사람 또한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지도의 용도가 달라지면 제작 방법도 달라진다.
우리가 보는 지도는 어떨까? 교실 벽에 걸려 있는 지도는 대부분 메르카토르 도법을 따른다. 메르카토르 도법은 과연 세상을 제대로 보여줄까? 물론 아니다. 공처럼 생긴 지구를 뒤틀림 없이 평면 위로 옮길 수는 없다. 방향을 맞추면 땅 크기가 틀어지고, 면적을 살리면 방향이 꼬인다. 그러니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하는 게 지도의 숙명이다. 메르카토르 도법은 원래 항해를 위해 방향을 살린 지도 제작법이다. 우리는 세상의 모습을 ‘항해용 지도’로 파악하고 있는 셈이다.
용도에서 어긋난 순간, 지도는 엉뚱한 편견을 낳는다. 메르카토르 지도에서 그린란드는 아프리카 대륙만큼이나 크다. 극지방으로 갈수록 배율이 커지는 탓이다. 이러한 이유로 메르카토르 도법은 ‘서구 중심주의의 상징’으로 공격받곤 했다. 극지방에 가까운 유럽은 크게 표현되어 작은 곳까지 상세하게 표현할 수 있지만, ‘변방’에 위치한 나라들은 작고 초라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대영제국은 메르카토르 도법에 따라 영국령(領) 캐나다가 미국보다 더 크게 그려진 지도를 교과서에 실었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략한 데에는, 동유럽과 러시아가 유독 커 보이는 메르카토르 지도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지도는 바라보는 관점, 원하는 방향에 따라 다양하게 그려지곤 한다. ‘객관적인’ 지도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교실 벽에 걸린 메르카토르 지도를 세상이 생긴 모습으로 의심 없이 받아드린다.
지도는 세상의 모습보다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세계에 대한 선입견’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안광복 중동고 교사 timas@joongdong.org
나는 무엇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요?
우리 학교의 약도를 그리고 친구들과 서로 비교해 봅시다. 어떤 이는 건물을 중심으로, 어떤 친구는 거리나 시간을 잣대 삼아 길을 풀어나갑니다. 기준으로 삼는 건물이나 표시도 제각각 다릅니다. 나는 무엇에 따라 약도를 그렸습니까? 길을 설명할 때 주목하는 건물이 친구와 다르지는 않았나요? 이에 비추어 볼 때 나는 무엇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요? ‘세상을 보는 틀’에서 나는 친구들과 어떻게 같고, 무엇이 다른지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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