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천철장은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원전 2, 3세기경부터 한반도에서 채취한 철을 중국으로 수출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채광지(採鑛地)로 추정되는 곳. 울산문화재연구원은 “수혈유구에서 기원전 2세기의 삼각형점토대토기편 등이 발견된 점에 미뤄 이때부터 철을 캐냈다고 볼 수 있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물증’을 확보하지 못해 애를 태워왔던 사학계는 환호했다. 일부에서는 “한반도 철 생산시기를 1세기가량 앞당길 획기적인 발굴”이라며 “국사 교과서도 바뀌어야 한다”고 흥분했다.
그러나 고대 제철유적 권위자인 국립중앙박물관 손명조 선임연구관은 현장을 살펴본 뒤 정반대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타원형인 수혈유구의 깊이가 1m, 넓이도 가장 긴 곳이 3m 미만인 데다 슬래그가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미뤄 철을 캤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울산문화재연구원 안재호(동국대 교수·발굴팀 조사위원) 부원장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고 그동안 힘들게 발굴작업을 해 왔던 발굴팀도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뒤 안 부원장이 “채광 흔적이 없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채광에 대한 사전 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과를 발표했다”고 시인했을 때 현장 설명회에 참석했던 문화계 인사와 취재진 등 100여 명도 허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산다’는 말이 나도는 학계에서 한 학자의 과오 지적에 다른 학자가 깨끗이 수긍하는 모습은 한마디로 신선했다. 학자적 양심에 따라 진실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는 한 우리 사학계의 앞날도 밝을 것이라는 생각에 현장을 떠나는 기자의 발걸음은 결코 무겁지 않았다.
정재락 기자 ra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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