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光海君)은 유능한 군주였다. 명(明)나라 관리들조차, 임진왜란의 ‘전시 작전권’은 세자인 광해군에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왕이 된 후에도 그는 혀를 내두를 만큼 수완 좋은 외교를 펼친다. 명나라가 후금(後金)을 혼내주기 위해 군대를 보내라고 하자, 그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라며 뜨뜻미지근하게 응수한다. 망해가는 옛 친구에게는 명분을 살리고, 떠오르는 청(淸)에게는 원한 사지 않는 현답(賢答)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의리와 도덕으로 먹고살던 조선의 선비들은 달랐다. 그네들은 임진왜란 때 입은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리지 말라고 왕을 다그쳤다. 심지어 왕비조차도 편지로 ‘비겁한’ 남편을 꾸짖을 정도였다. 결국 광해군은 부도덕한 군주로 몰려 왕좌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곧이어 들어선 인조(仁祖)는 뻣뻣하게 자존심을 세웠고, 그 결과는 나라를 결딴낸 병자호란으로 이어졌다.
역사 교과서는 병자호란을 도덕만 알고 외교에 무능했던 정권이 낳은 재앙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볼 일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배부르고 등 따신’ 생활이 전부는 아니다. 쪽박을 차더라도 도덕과 의리를 지켜야 진정한 인간이 아닐까? 약삭빠른 처신으로 부와 권력을 얻을 수는 있어도 존경을 받기는 어렵다. 도덕윤리는 사람을 판단하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잣대이다.
도덕의 눈으로 볼 때는 역사 평가도 달라진다. 기독교 성경의 ‘신명기’도 이스라엘 왕들의 업적을 진실과 정의에 비추어 가늠한다. 얼마나 나라를 번성시켰는가는 그 다음 문제다. 정의와 명분을 이익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현대에도 얼마든지 있다. 오사마 빈 라덴도 그렇다. 그 역시 미국제 타임맥스 시계를 차고 있지만, 서구의 물질문명 자체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경건하고 신실한 이슬람의 정신을 더럽힌다는 이유에서다. 그의 눈에 풍요로운 서구 세계는 되레 타락하고 몰락한 문명으로 비칠 뿐이다.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은 경제가 몰락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올곧으며 정결한 마음을 갖춘 나라일수록 진정한 ‘선진국’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자존심과 도덕을 앞세우는 나라가 되레 더 몰염치하고 수치스러운 경우도 많다. 북한이 대표적인 예다. 북쪽의 권력자들은 ‘민족자존’과 ‘강성대국’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우리는 그네들에게서 확인하는 모습은 ‘민족의 수치’가 된 ‘빈곤소국’일 뿐이다. 굶주리는 북녘 동포들의 삶, 그럼에도 외교 예의에 아랑곳없이 큰소리치는 북측의 과감함을 보라. 형제인 우리들조차 세계 앞에 고개를 차마 못들만큼 창피해지지 않는가?
안광복 선생님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현실외교 광해군과 북벌론의 효종, 누가 더 뛰어난 왕일까?
정치 감각을 바탕으로 현실 외교를 펼쳤던 광해군과, 유교적 명분론으로 청나라에 복수를 꿈꿨던 효종(孝宗)의 ‘북벌론’을 서로 비교해 봅시다. 둘 중 누가 더 뛰어난 왕일까요? 둘의 외교 정책을 평가할 수 있는 ‘평가 기준표’를 만들어 봅시다. 어떤 사항을 평가 잣대로 삼을 수 있을까요? 토론하여 정해 봅시다. 그리고 점수를 매기고 우열을 가려보면서, 그 기준표를 우리 외교에도 적용해 봅시다. 명분과 실리의 갈림길에 있는 정책에서 우리나라 외교는 몇 점짜리 정책을 펼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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