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전 인권위 전원위원회 회의 도중 갑자기 사퇴의사를 밝힌 조영황(65) 인권위원장으로부터 24시간 만에 전화가 걸려온 것. “사직서를 써 놨으니 고속터미널로 나와서 받아가라”는 내용이었다.
위원장과 접촉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지만 연락이 안 돼 애를 태우고 있던 순간이었다.
인권위 사무처 간부들은 25일 밤 조 위원장의 사퇴를 만류하기 위해 서울 서초구 반포동 조 위원장의 집에 찾아갔다. 헛걸음이었다. 집에 아예 들어오지 않은 것.
배 팀장이 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 반경. 조 위원장은 평상복 차림에 헌팅캡을 쓴 채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터미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배 팀장은 사직서를 넘겨받으며 “청와대에서 사표를 반려할 수 있으니 연락처 하나는 꼭 달라”고 간곡히 말했다.
조 위원장은 “추호도 되물릴 생각이 없다. 내 나이 65세다. 모든 것을 비웠다”며 연락처를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배 팀장이 자리를 뜨면서 옆을 보니 서해안쪽으로 가는 버스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인권위 내부 관계자가 전한 조 위원장이 정식으로 사표를 인권위에 제출한 순간이다.
한편 조 위원장의 부인 A 씨는 이날 오후 6시경 집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남편은 위원장 제의가 들어왔을 때부터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몇 달 전부터 ‘젊고 똑똑한 사람이 위원장을 맡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했다.
A 씨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A 씨는 인권위원들과의 갈등에 대해 “남편이 바깥일을 집에 돌아와 시시콜콜 털어놓는 편이 아니었지만 느낌이 그런 것 같았다”며 “잘 해보려고 한 일에도 충돌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A 씨는 또 “남편은 25일 사의를 밝힌 뒤 오후 4시경 귀가해 가족들에게 ‘그만뒀다’고 말한 뒤 바로 문상을 하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서 현재까지 귀가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본보 기자와 만난 전현직 인권위 위원들은 조 위원장의 사의 표명이 오랫동안 쌓여온 인권위 내부 갈등 때문이라고 밝혔다.
사퇴의 도화선이 됐던 22일 상임·비상임위원 워크숍에 참석한 한 인권위 관계자는 “위원들이 인권위 운영방식과 인사 등에 대해 질문을 하면 위원장이 답변을 하는 형태로 워크숍이 진행됐다”고 밝혔다. 위원장에 대한 청문회를 방불케 했다는 것.
이 관계자는 “위원장이 특정 발언 때문에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이 아니라 위원장의 책임을 묻는 듯한 질문이 계속되자 참다 못해 나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초대 인권위 위원을 지낸 B 씨는 “인권위 설립 때부터 위원회 운영에 대한 일정한 규칙이 없어 내부적으로 의견대립이 많았다”며 “특히 인권위 상임, 비상임위원들의 재량권이 어디까지인지에 대해서는 1기 때부터 문제제기가 있었는데 그런 갈등이 이제야 폭발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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