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증거는 없었으나 검찰은 A 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보고 B 씨를 구속기소했다. 그러나 B 씨는 법정에서 ‘검사가 청부수사를 한 것’이라며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다.
증인으로 법정에 불려 나온 A 씨는 피고인석에 앉은 두목 B 씨와 방청석에 나온 다른 조직원들의 눈치를 살피다 검찰에서 한 진술을 번복했다. 결국 B 씨는 증거 부족으로 무죄가 선고돼 풀려났다.”
지난해 6월 검찰이 사법개혁추진위원회에서 공판중심주의가 시행됐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가상해 본 사례다. 물론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한 것이지만 법조계에서는 공판중심주의의 도입을 놓고 여러 가지 부작용을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재판 지연된다?=공판중심주의는 검찰의 수사기록보다는 공개된 법정에서의 당사자 간 공방을 토대로 법관이 유무죄를 판단한다. 검찰에서 작성한 진술조서는 법정에서 피고인이나 증인이 부인하면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검찰 측의 우려다.
하지만 공판중심주의의 시범 운영 결과는 꼭 그렇지도 않다. 올해 4월부터 시범재판부로 지정된 서울중앙지법의 한 단독재판부는 최근까지 190여 건의 사건을 선고했으나 검찰의 우려와 달리 무죄선고는 한 건도 없었다.
다만 재판 과정에서 검사와 변호인, 피고인과 증인 간에 입씨름이 벌어지면서 재판에 걸린 시간은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대개 형사재판부는 한 번 재판을 할 때 사건당 30분 정도를 할애하고 있으나 1시간을 훌쩍 넘기는 것이 흔한 일이 됐다.
형사사건 1심 재판은 이전처럼 검찰 수사 기록을 토대로 하더라도 평균 2, 3개월 정도 걸린다. 유무죄를 첨예하게 다툴 때는 6개월을 넘기는 일도 있다.
검찰 수사 기록을 배제한 채 법정에서 당사자 간 공방으로 진실을 가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재판이 무한정 지연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검찰 관계자는 “미국식 재판 모델을 토대로 추산하면 형사재판에 소요되는 시간이 지금보다 4, 5배 길어질 것”이라고 추산했다.
그러나 이 역시 시범 운영 결과 오히려 재판 기간이 다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2004년 4월 이후 증거분리제출제도를 시범 실시한 서울남부지법, 대전지법, 광주지법에서는 1심 재판기간이 이전의 50.4∼156.1일(재판부별 최소∼최대기간)에서 53.5∼106.7일로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
법원 측은 기존에 2, 3주에 한 차례씩 열던 공판을 1주일에 2, 3차례씩 여는 집중심리제를 통해 재판 지연을 막을 수 있다고 밝혔다. 재판에 투입되는 총시간은 늘어나더라도 선고까지의 기간은 줄일 수 있다는 얘기다.
▽국민정서에 맞지 않다?=법조계 일각에서는 “영미식 공판중심주의는 남의 면전에서 불리한 얘기를 못하는 우리 국민의 정서와 맞지 않다”고 지적한다.
지연, 학연 등으로 얽힌 한국적 풍토에선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 친분이 있는 피고인 앞에서 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아는 사람’을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도 별다른 죄책감을 잘 느끼지 않는다는 게 수사기관 관계자들의 얘기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우리와 형사소송 체계가 비슷한 일본만 해도 2001년 이후 위증 혐의로 기소된 사람이 연평균 8명에 불과했다. 반면 한국은 연평균 1318명이 위증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수사기관에서 허위진술을 하면 엄하게 처벌하는 사법방해죄를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은 법정에서 위증을 할 때만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법원 측은 “지금 같은 서류 재판에서는 증인이 위증을 해도 모를 때가 많다”며 “그러나 공판중심주의를 하게 되면 검사나 피고인 또는 변호인이 적극적으로 공방을 벌이는 과정에서 증인의 허위진술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오히려 공판중심주의로 위증을 억제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단기적 부작용 최소화해야”=검찰은 공판중심주의가 본격화되면 불구속 재판이 늘어나 범죄 피해자나 목격자(증인)에 대한 협박이나 회유, 매수 같은 일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특히 물적 증거가 없어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뇌물 사건이나 테러, 간첩 사건 수사는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
법원 일각에서도 단기적으로 범죄 발생률이 높아지는 부작용을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여성계에서는 “성범죄 피해자 같은 경우엔 2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며 보완책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피해자가 형사재판에 참여하는 건 헌법상의 권리”라며 “피해자도 재판에 적극 참여해 피해 회복과 가해자 처벌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상을 고착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에 ‘사법 양극화’ 현상이 심화될 수 있다는 얘기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 비용은 얼마나 늘어날까
법정에서의 직접 진술을 더 중시하는 공판중심주의를 제대로 시행하기 위해서는 형사재판을 맡을 판사는 물론 공판에 참여할 검사 인력의 증원이 불가피하다.
형사법정도 더 늘려야 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비용이 소요될 것이라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지난해 사법개혁추진위원회에서 공판중심주의 본격 시행을 위한 형사소송법 개정 논의가 한창일 때 검찰은 내부 검토 자료를 통해 증원되는 판검사와 보조 인력의 인건비로 연간 6000억 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추산했다.
지난해 2월 현재 전국적으로 형사재판을 담당하는 판사는 710명. 검찰 조서를 토대로 재판이 진행되는 지금과 달리 법정 공방을 통해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이보다 4, 5배 많은 3000여 명의 형사재판 판사가 필요하다는 게 검찰 측 주장이다.
210명 수준인 공판 관여 검사도 8, 9배에 이르는 1900명 정도로 늘려야 한다는 것. 공판 관여 검사 1명이 맡고 있는 피고인은 월평균 126명 정도로 현재의 인력으로는 공판중심주의를 시행하는 데 턱없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인력 외에 형사법정과 검사실을 늘리는 데에도 6500억 원 정도가 소요된다는 게 검찰 측의 예상이다.
형사법정은 180여 개에서 10배 가까운 1800여 개가 추가로 필요하고, 검사실도 지금보다 1600개실 이상이 더 필요하다고 검찰 측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법원행정처의 설명은 다르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2003년부터 형사재판부와 형사법정 수를 늘려 공판중심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인적, 물적 여건을 개선해 왔다”며 “형사법정이 다소 부족한 게 사실이지만 현재의 인적, 물적 여건으로도 공판중심주의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전국의 형사재판부가 2002년에는 211개였으나 현재 301개로 크게 늘었고 형사법정도 2002년 125개에서 지금은 181개로 50%가량 늘었다는 것.
법원행정처는 형사법정 수를 계속 늘려갈 계획이며 현재 예산 당국과 협의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공판중심주의 실현에 가장 큰 장애는 공판 관여 검사가 제 구실을 못하고 있는 것”이라며 “공판 검사의 증원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검찰 측의 준비 부족을 꼬집었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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