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변화가 적으면 법도 단순하기 마련이다. 함무라비 법전이나 십계명을 떠올려 보라.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 하지 마라’ 등의 간단한 법규만으로도 사회를 꾸리는 데 무리가 없었다. 수백 년 전 조상들이나 자신들이나 가축을 기르고 땅을 갈아 먹고 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관습과 도덕도 안정되어 있기 마련, 어지간한 문제는 법을 빌리지 않더라도 ‘조상의 지혜’에 따라 원만히 수습될 터였다.
그러나 복잡하고 변화가 빠른 시대에는 법도 어지럽기 그지없다. 전통은 새로운 현실에 어울리는 답을 주지 못한다. 예컨대, 나이든 사람을 공경하라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규범은 농업 사회에 어울린다. 농사에 꼭 필요한 자연 변화를 읽는 눈은 오래 산 사람의 경험에서 얻어지는 탓이다. 그러나 순발력과 창의성이 중요한 지금에 와서는 나이가 곧 지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문제가 생기면 법에 의지하는 일도 많아진다.
하지만 이제 법조차도 한계가 온 느낌이다. 문명의 발전 속도는 항상 법보다 한 박자 빠르다. 정보통신이나 생명공학 같은 첨단 분야가 대표적이다. 적용할 법이 없는 새로운 경우가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관련법이 만들어지곤 한다. 이런 사례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그럴수록 ‘법의 해석’이 중요해진다. 새로 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이전의 법규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소크라테스가 고민했던 “악법도 법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사람을 해치면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줄기세포 연구가 옳은지 아닌지를 가늠하기란 어렵다. 물건을 훔치는 행동은 당연히 나쁘지만, 내 홈페이지에 올린 예술품 사진이 죄가 되는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설사 잘못되었다 해도 누구에게 죄를 지었는지가 헷갈린다. 내가 대가를 치러야 할 사람은 작품을 만든 예술가인가, 아니면 사진을 찍은 사람인가?
물론 없던 상황이 일어나면 이를 정리할 법이 당연히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문제는 새로운 법이 제대로 되었는지, 악법(惡法)인지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법은 개혁을 이끌기도 하지만, 발전을 막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줄기세포 연구를 금지하는 법을 만든다면, 이는 과연 사회 발전을 이끄는 ‘개혁법안’인가, 과학에 뒷다리를 잡는 ‘악법’인가?
법이 제대로 되었는지를 가늠하는 기준은 대개 다음과 같았다. 첫째, 법은 많은 사람들의 동의 아래 만들어져야 한다. 둘째, 사회를 안전하고 평안하게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의나 평등과 같은 인류 공통의 도덕에 걸맞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의 기준은 현대의 법을 평가하는 데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먼저, 변화의 맨 앞에 선 첨단 분야일수록 ‘다수의 동의’는 별 의미가 없다. 소수 전문가의 견해가 더 정확할 수 있는 까닭이다. 둘째 기준도 마찬가지다. 니버(R. Niebuhr)는 법에는 변화를 억누르는 속성이 있음을 꼬집는다. 변화에는 혼란과 불안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법은 어떤 경우에나 한결같은 원칙과 질서를 유지하려 한다. 둘째 기준을 고집한다면 법은 ‘변화의 족쇄’에 더 가까워진다.
마지막 기준도 이제는 어설프다. 정의나 평등은 더 이상 공통의 도덕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한 사회의 시민은 대개 같은 종교와 문화 속에 있었기에, 정의나 평등 등에 대해 비슷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통일된 가치관이 점점 사라지는 가운데, 똑같은 ‘정의’라는 낱말을 놓고도 사람에 따라 생각하는 바가 다 달라지고 있다. 문화와 종교가 완전히 다른 나라가 함께 세상을 엮여가는 국제화 시대에 이러한 문제는 더욱더 크게 다가올 터다.
이제 우리는 “악법도 법인가?”를 물었던 소크라테스보다 더 심각한 고민에 부닥친 듯하다. “악법을 가릴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새로운 물음 앞에서 우리는 어떤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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