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정기 받아…”, “××강 물굽이 에워 도는 기슭에…” 등등, 교가(校歌)에는 산이나 강이 빠지지 않는다. 눈에 띄는 산과 강이 없으면 땅의 위치라도 나오기 마련이다. “서울 복판에 우뚝 솟아…”, “××벌 너른 들판…”식으로 말이다.
왜 이렇게 교가에는 땅의 모습이 많이 사용될까? 자신이 속한 땅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애국가에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등장하지 않는가!
나아가 땅의 생김새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민족성에 대한 믿음도 완전히 달라진다. 일제강점기,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는 한반도를 나약하고 겁 많은 토끼의 모습으로 설명했다. 발끈한 최남선(崔南善)은 바로 맞받아친다.
“한반도는 마치 맹호(猛虎)가 발을 들고 대륙을 향해 생기 있게 할퀴며 달려드는 모양을 보여 주고 있다.”
그뿐 아니다. 땅은 정치를 움직이는 중요한 명분이 되기도 한다. ‘땅의 기운이 약해졌으니 수도를 옮겨 나라를 새로 열어야 한다’는 주장은 왕조가 바뀔 때마다 등장하곤 했다. 경주에서 개성으로 도읍을 옮긴 고려가 그랬고, 개성에서 한양으로 위치를 바꾼 조선이 그랬다. 이권을 쥔 자들에게 수도를 옮겨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다가는 되레 밀릴 수 있다. 이럴 때마다 기운이 솟아나는 땅으로 옮겨야 나라가 핀다는 ‘지덕쇠왕설(地德衰旺說)’은 강력한 설득 무기가 되었다. 소소한 이익을 놓고는 논쟁이 벌어지기 쉽지만, 우주의 순리(順理)에 따라야 한다는 데 어떻게 반대할 수 있겠는가?
과학이 지배하게 된 세상에서도 땅은 여전히 큰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역사 왜곡으로 비난받는 후소샤(扶桑社) 역사교과서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땅의 모양새로 정당화한다. 조선반도는 ‘흉기’처럼 일본을 향해 튀어나와 있기에, 대륙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라도 조선을 자기네가 가져야 했다는 논리다.
땅을 명분으로 삼는 것은 일본침략주의자들만이 아니다. 지정학(地政學·geopolitics)은 나라나 집단이 어디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정치나 경제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지리가 곧 운명’이라는 식의 ‘지리결정론’을 펴곤 한다.
하지만 지리결정론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함에 따라 점점 약해지는 추세다. 과학기술은 필요하면 산을 허물고 바다를 메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옛날에는 땅이 사람들의 성격과 처지를 좌우했다면, 이제는 인간의 결심이 땅의 ‘운명’을 바꾸곤 한다.
아파트 택지를 만들기 위해 작은 산 하나를 통째로 들어내는 일도 이제는 별로 신기하지 않다. 사람들은 이제 더는 자기가 사는 곳을 마을 뒷산과 개천으로 떠올리지 않는다. 자기 집이 있는 ‘×× 아파트 단지’와 ‘×× 상가’부터 먼저 생각날 터다.
하지만 여전히 땅은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다. 중국에서 백두산에 스키장을 만든다는 발표는 많은 국민을 화나게 했다. 왜 그럴까? 경제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스키장 투자가 별것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백두산은 우리 민족에게 그 이상의 무엇이다.
그렇다면 우리 마을 뒷산과 정겨운 실개천은 어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산과 강의 모양을 바꾸는 높다란 신도시들이 들어서고 있다. 시멘트 건축물들은 60여 년을 갈 뿐이다. 지금 아파트 단지의 아이들은 수십 년 후면 자신의 ‘고향’이 송두리째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마을로 바뀌었음을 확인하게 될 터다. 땅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허공에 떠 있는 시대, 우리의 정체성을 붙들어 맬 곳은 어디일까?
최창조 교수는 풍수지리를 믿던 우리 조상들이 ‘풍수(風水)’와 ‘지리’를 구분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조상들도 ‘지리’적인 필요에 따라 땅을 바꾸고 이용할 줄 알았다. 그러면서도 땅의 큰 그림인 ‘풍수’는 보듬을 줄 알았다.
알프스 없는 스위스, 후지 산 없는 일본을 상상할 수 있을까? 남산 없는 서울과 무등산 없는 광주는? 뒷산과 개천이 사라진 우리 마을은?
땅의 가치는 이용에만 있지 않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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