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에 북한을 탈출한 뒤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던 '첫 탈북 국군포로' 조창호 씨가 19일 지병으로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5세.
4월에만 해도 미국 하원의 국제관계위원회 합동청문회에 나가 "북한에 있는 540여 명의 국군포로 송환을 위해 한국정부와 국제사회가 나서야 한다"고 호소했던 그였다. 이후 7개월 사이 암과 뇌졸중이 조씨의 몸을 덮쳤지만 고인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억류된 국군포로들을 귀환시켜야 한다"는 말을 되뇌었다고 유족들은 전했다.
고인은 1994년 10월 23일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43년간의 억류 생활을 마감할 수 있었다.
연세대 교육학과 1학년 재학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국군에 소위로 자원입대했던 그는 이듬해 8월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 포로가 됐다.
북한의 전향 회유를 끝내 거부하자 1952년부터 그는 북한 내 악명 높은 덕천, 서천, 함흥 등지의 노동교화수용소에서 12년 6개월 간 갇혀 지냈다.
수용소 생활을 마치고도 고된 삶은 끝나지 않았다.
고인은 다시 13년간 구리 광산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렸으며 규폐증 판정을 받고서야 탄광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고인은 1994년 10월 3일 뗏목으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했고, 중국 어선을 타고 20일 뒤 한국 땅을 밟았다.
귀환 이튿날인 10월24일 병상에서 국방부 장관을 맞은 그는 "육군 소위 조창호, 군번 212966 무사히 돌아와 장관님께 귀환 신고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을 잊었던 '조국'을 울렸다.
고인은 그해 11월 육군사관학교에서 중위 계급장을 달고 전역했다. 1995년 윤신자(66) 씨와 결혼했고 같은 해 모교에서 학위도 받아 대한민국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신을 다시 찾은 듯했다.
그러나 고인은 안락한 생활에 머물지 않고 정부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침묵할 때마다 집회 등에 참여해 정부에 적극적인 대책을 촉구해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윤 씨와 북한에 두고 온 2남 1녀가 있다. 고 조창호 중위의 장례식은 재향군인회의 첫 향군장(鄕軍葬)으로 21일 오전 7시 반 경기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치러진다. 유해는 화장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묻힌다. 031-787-1503
성남=이동영기자 arg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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