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삶이 바뀝니다]구두수선점 이창식씨의 나눔 스토리

  • 입력 2006년 12월 1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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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수선점을 운영하며 벌이의 1%를 기부하는 이창식 씨. 가게에 놓인 커다란 돼지 저금통은 이웃들을 나눔으로 끌어들이는 그의 동지다. 변영욱 기자
구두수선점을 운영하며 벌이의 1%를 기부하는 이창식 씨. 가게에 놓인 커다란 돼지 저금통은 이웃들을 나눔으로 끌어들이는 그의 동지다. 변영욱 기자
《‘자선을 넘어 변화로(Not Charity, But Change).’ 기부문화 선진국들이 최근 앞 다퉈 내거는 구호입니다. 기부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온정’에 그치지 않습니다. 기부하는 사람과 그 가족의 삶을 바꿉니다. 동아일보는 ‘아름다운 재단’(대표 박상증)과 공동으로 기부문화의 새 모델을 찾아가는 기획 시리즈 ‘나눔, 삶이 바뀝니다’를 시작합니다. 일회적인 기부를 넘어 일상에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일터를 나눔의 공동체로 만든 직장을 소개합니다. 이 시리즈는 SK텔레콤이 후원합니다. 구세군의 자선냄비 종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지는 12월, 독자 여러분을 나눔의 기쁨으로 초대합니다. 》

연립주택과 작은 공장들이 모여 있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 주택가 골목의 구두수선점.

한 평이 채 안 되는 이 가게에는 어른이 안아도 한 아름인 붉은색 돼지 저금통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구두를 닦으러 왔다가, 혹은 낡은 구두의 굽을 갈거나 창을 갈러 왔다가, 주인 이창식(49) 씨 옆에 잠시라도 앉게 되는 사람들은 어색한 침묵을 깨느라 묻게 된다.

“아저씨, 저금통 크네요. 아기 거예요?”

“아, 그거요….”

미소가 번지는 이 씨의 얼굴. 또 한 사람의 이웃이 이 씨의 ‘선한 낚시’에 걸려드는 순간이다.

○ “너를 세우려면 남을 도와라”

이 씨는 23년째 같은 자리에서 구두를 닦고 수선하고 있다. 그러나 그 23년이 한결같지는 않았다.

그는 한때 소주 다섯 병을 마시지 않으면 하루를 넘길 수 없는 알코올의존자였다. 1996년 성격 차이로 아내와 이혼한 뒤 그는 바깥출입을 끊었다. 언젠가는 고향에 내려가서 아내와 함께 농장을 꾸리겠다던 꿈마저 이혼과 함께 날아갔다.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간 것만 두 번. 그렇게 4년이 흘렀다.

자살을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 없는 어린 딸과, 그 딸을 돌보는 늙은 어머니가 눈에 밟혔다.

두 번째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 온 뒤, 그는 술을 끊기로 독하게 마음먹었다. 이 씨 대신 딸을 맡아 기르던 어머니는 “이제 내가 아이를 키우겠다”며 찾아간 이 씨에게 뜻밖에도 “새 삶을 살려면 남을 도우라”는 말을 했다.

“어디 몸 불편한 사람이라도 한 사람 정해서 도와주면 어떻겠니?”

처음엔 어머니의 말이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내가 남 도울 처지인가’ 싶었다. 그 생각은 ‘몸 불편한 사람도 열심히 살아가는데 젊은 나이에 내가 이렇게 폐인처럼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것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누군가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막막했다. 모금 단체에 대한 불신도 떨치기 어려웠다.

휴업 상태였던 구두수선점을 다시 연 이 씨는 아름다운 재단을 통해 소득의 1%를 적립하는 방법을 택했다. 들쭉날쭉한 한 달 수입을 100만 원으로 잡고, 매달 1만 원씩을 내기로 약속했다.

계좌에서 기부금이 한 달 두 달 빠져나가며 그에게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자부심이 쌓이기 시작했다.

“남을 도우면서 반사적으로 얻어지는 자신감이랄까요. 사고방식도 긍정적으로 바뀌어 하는 일도 잘 풀리더군요.”

○ 이웃에 번진 나눔 바이러스

기쁨에는 전염성이 있었다.

이 씨는 자장면을 먹으러 이웃의 중국집에 갈 때, 일용품을 사러 슈퍼에 갈 때, 감기 치료를 받으러 의원에 갈 때 조심스레 1% 기부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구둣방 이 씨’가 술독에서 빠져나와 가게 문을 다시 연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이웃들은 그의 기부 제안에 기꺼이 귀 기울여 줬다.

“처음엔 제가 못미더웠을 거예요. 그런데 막상 얘기를 꺼내 보면 다들 그러고 싶은 마음들은 있는데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더라고요.”

이 씨의 가게가 있는 골목은 어느덧 ‘나눔골목’이 되어가고 있다. 이 씨의 권유로 중국집, 슈퍼마켓, 한식당, 포장마차 주인과 동네 의원의 의사가 1% 기부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매달 이 씨를 통해 3만 원씩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하는 한식당 성림회관 주인 이명숙(72·여) 씨는 “자기 처지도 어려운데 남을 돕겠다는 이 씨의 의지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고 말했다.

○ 마음의 광을 내다

이 씨가 구두 한 켤레를 닦고 받는 돈은 2500원. 주 6일, 하루 13시간 이상 일해서 버는 돈은 월 100만 원 남짓이다. 그중 4만 원은 갈 곳이 정해져 있다.

1만 원은 아름다운 재단에, 또 1만 원은 아름다운 재단 산하 ‘나눔포럼’에, 1만 원은 경기 이천시에 있는 장애인 시설 ‘작은 평화의 집’에, 또 1만 원은 사회단체인 ‘희망제작소’에 보낸다.

이 씨는 월세 15만 원, 보증금 1000만 원짜리 반지하 전세방에 살고 있다. 구두수선점도 내년 말까지는 철거가 예정돼 있다. 오랜 세월 밀폐된 공간에서 먼지를 마신 탓인지 2004년에는 폐결핵 판정을 받기도 했다.

“이젠 등산을 갈 만큼 몸이 나았어요. 욕심을 버려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요. 저는 매일 간사한 마음이 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요.”

이 씨를 둘러싼 환경은 무엇 하나 녹록한 것이 없지만 이 씨에겐 꿈이 있다. 장애인들과 함께 농촌에서 작은 농장을 꾸리는 것이다. 무너졌던 그의 소망을 함께 일으켜 세워 줄 새 반려자도 찾았으면 하고 기원한다.

간밤에 술에 취해 구두를 더럽혔던 회사원 정훈(36) 씨가 이 씨의 손길이 닿아 말끔해진 구두를 신고 가게를 나서며 웃었다.

“토사물로 얼룩진 구두를 내놓은 게 미안해서 거스름돈 500원을 받지 않았더니 아저씨가 그 돈을 그대로 기부함(돼지 저금통)에 넣으시네요.”

이 씨의 일터는 이제 그 골목에서 ‘마음의 광을 내는 가게’로 불린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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