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수만 하는 단체장 NO” 할 일 하는 시장-군수들

  • 입력 2006년 12월 7일 02시 59분


5일 오후 3시 충북도청 도지사 집무실.

정우택 충북지사를 만난 정구복 충북 영동군수는 지방산업단지 조성과 포도주 열차 운행 등 최근의 지역 현안을 보고하고 예산 지원을 요청했다.

행사 참석 계획대로라면 그는 영동읍에서 열린 건강체조실 준공 행사장에 있어야 했다.

축사를 하고 주민들과 악수하며 얘기를 나누는 등 1시간 가까이 시간을 보내는 게 그의 ‘본연의 업무’였다. 그러나 그 업무는 부군수가 대신했다.

정 군수는 취임 이후 5개월간 각종 행사와 경조사 등에 참석하느라 ‘진짜 할 일’을 못하는 현실을 참다 못해 “소규모 지역 행사에 가지 않겠다”고 3일 선언했다.

꼭 필요한 회의나 행사를 제외하고 읍면과 마을 단위 행사 참석은 부군수나 읍면장 등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민선 5기 출마를 노리는 경쟁자들이 벌써부터 각종 행사에 얼굴을 내미는 상황에서 그의 결정은 쉽지 않았다. “군수 되더니 변했느냐”는 주민들의 비아냥도 걱정됐다.

그러나 ‘얼굴 도장 찍기’를 포기하고 중앙부처를 찾아 예산을 따고 기업을 유치하는 데 힘을 쏟기로 마음먹었다.

정 군수는 “하루 5, 6개까지 되는 행사에 참석하다 보면 정작 할 일을 못하고 시간을 다 보내기 일쑤”라며 “지역민들의 표심(票心)은 업적으로 평가받겠다”고 말했다.

박병종 전남 고흥군수 역시 쉽지 않은 선택을 했다.

박 군수는 1일 두원면 진목마을 버스운행 개통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지난달 30일 봉래면 나로도 청년회의소(JC) 회장단 이취임식에도 가지 않았다. 그 대신 면장을 보내 축사를 하도록 했다.

그는 지난달 9일 전국 지자체 가운데 처음으로 ‘군수의 각종 행사 참석에 관한 지침’을 마련했다.

지침 내용은 이렇다. 군수는 중앙 및 도 단위 행사를 비롯해 군 주관 대규모 행사, 유관기관단체 주관 중요행사, 사회단체 주관 시책토론회, 세미나 등에만 간다.

군(郡) 주관 소규모 행사나 회의, 읍면민의 날 등은 실장이나 과장이, 각종 마을경로행사나 잔치, 마을회관·노인정 준공식 등 작지만 대민접촉이 많은 행사는 읍장이나 면장이 가도록 했다.

비서실 관계자는 “지침대로 할 경우 현재 연간 400건 이상인 군수 행사 참석 건수가 100건 이내로 줄어든다”며 “처음에는 야속하게 생각하는 주민도 있었으나 이런 취지를 설명했더니 이제는 다들 이해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충북 괴산군 임각수 군수는 아예 취임 첫날 “얼굴 알리기 행사 불참”을 공식 선언했다. 마을 이장과 새마을지도자 등에게는 “무분별한 군수실 방문을 자제해 달라”는 편지도 보냈다. 처음에는 “당선되더니 사람이 달라졌다. 두고 보자”는 등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제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주민들이 “잘했다”고 칭찬하고 있다.

박주원 경기 안산시장은 취임 한 달 후인 8월부터 행사 참석을 대폭 줄였다.

각종 행사에 다니느라 결재가 늦춰지고 지역 현안을 챙길 시간도 부족해 원활한 직무수행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판단 때문.

실제로 시가 박 시장의 지시에 따라 2004년도 1년간 주간행사계획을 분석한 결과 시장은 모두 633건의 행사에 참석해 하루 평균 2개꼴이었다. 오가는 시간에 축사 등 실제 행사에 참석하는 시간을 감안하면 3, 4시간은 훌쩍 넘기는 게 예사였다.

박 시장은 “행사 참석 시간에 시청을 찾는 민원인들의 면담시간과 횟수를 늘리고 시의 장기비전이나 대형 사업들을 현장에서 챙기고 있다”며 “처음엔 불만이던 주민들도 이젠 많이 이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충북대 최영출(행정학과) 교수는 “대다수 지자체장이 이런 어려움을 겪지만 학연과 혈연, 지연으로 얽히고설킨 탓에 과감히 뿌리치지 못하고 있다”며 “지방자치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이런 지자체장이 많이 나타나야 하고 무엇보다 주민들의 이해가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동=장기우 기자 straw825@donga.com

고흥=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안산=남경현 기자 bibul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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