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많은 사람이 밀어붙여 마음 흔들리는건 사실”

  • 입력 2006년 12월 22일 03시 01분


《열린우리당이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여권의 대선후보로 끌어들이기 위한 ‘작전’에 돌입한 듯한 분위기다. 당 안팎에서 민주당 등과의 통합신당이냐 당 리모델링이냐의 논란과는 별개로 ‘정운찬 카드’를 거론하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정 전 총장에 대한 여권의 ‘구애’가 지난해 말부터 3월까지 이어진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서울시장 후보 영입 ‘구애’ 과정과 비슷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은 21일 오전 “잠을 편히 못 잤다.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최근 범(凡)여권 대선 후보 중 한 사람으로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이 마음 편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전날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은 일부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 전 총장을 두고 “좋은 사람이고 역량이 있으며 충분한 자격이 있다. 결단을 내려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한 TV는 정 전 총장이 “정치를 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가 마침내 정치 참여를 강하게 시사했다는 것이다.

이날 오전 서울대 연구실에서 기자와 만난 정 전 총장은 “그 보도는 내 생각보다 훨씬 앞서나갔다”고 말했다. 앞뒤 맥락을 거두절미했다는 것이다.

그는 “언론에서 자꾸 내 이름을 거론하다 보니 정치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뜻이었다”면서 “그러나 내게 대통령직은 벅차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은 되는 것도 어렵지만 하는 것은 더 어렵지 않느냐”고 말했다가 이내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저 사람, 대통령 할 생각은 있나 보네’라고 할지도 모르겠다”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김 의장의 ‘결단 요청’에 대해서도 “내게 아무런 제의도 없었는데 무엇을 결단하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총장은 사석에서 김 의장의 인터뷰 내용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표시했다는 후문이다.

인터뷰 내용 중 ‘정 전 총장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탄생에 기여했다’고 한 부분에 대해 “내가 무슨 기여를 했다고…”라고 의아했다는 것. 또 김 의장에게 ‘수시로’ 조언한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에 대해서도 “요즘 들어 만나지도 않는데 조언은 무슨…”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 전 총장은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1년 선배로 평소 친분이 있는 김 의장과 이달 초 2년여 만에 처음 만났다고 한다. 이를 두고 모종의 정치적 논의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지만 정 전 총장은 “다른 지인들과 같이 만나서 술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진지한’ 이야기가 나올 틈도 없었다고 했다.

정 전 총장을 정치로 모는 주위의 ‘바람’이 거센 것은 사실이다. 범여권 후보로 나올 경우 경쟁력이 강할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올해 7월초 서울대 영빈관에서 열린 그의 총장 퇴임 축하연은 흡사 ‘정 전 총장 대선 도전 선언의 밤’ 같았다고 한다.

참석자들은 “시간이 되면 큰일을 하시라”, “상식적인 사람이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 “정 총장은 할 일이 많은 재목” 등의 덕담을 건넸다고 한다. 정 전 총장은 “오늘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한 지인은 정 전 총장에게 주기적으로 정국 분석 보고서를 보내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전 총장은 “마뜩치 않다”고 했다.

그가 흔들리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정 전 총장은 최근 서울대 경제학과 은사인 조순 전 서울시장을 찾아 정치 참여 여부에 대한 고민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전 총장은 최근 사석에서 “너무 많은 사람과 사회의 움직임이 나를 정치로 밀어붙이니 흔들리는 게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정치에 뛰어드는 게) 두려운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오랜 지인인 김종인 민주당 의원은 “나한테 한번도 정치를 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적이 없다”면서 “만약 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때가 아니다. 언론이 그런 사람은 보호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 전 총장은 경제학자다. ‘대선 출마의 경제학’을 생각해 보지 않았을 리 없다.

그는 사석에서 “충청도에 강연을 하러 갔더니 그쪽 분들이 ‘이번에는 충청도 후보가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더라. 나는 돈도 조직도 없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누구는 내가 정치를 하겠다면 돈과 조직이 저절로 들어온다고 하는데 그걸 어떻게 믿느냐”고도 말했다고 한다.

정 전 총장과 같이 일해 본 한 서울대 교수는 “틀림없이 정치를 한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정 전 총장이 서울대 총장 시절에 추진한 통합논술이 아주 미묘한 사안이었는데 자신은 노무현 대통령과 맞서는 좋은 이미지를 남겼다”며 “정치적인 사람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 전 총장은 다른 자리에서 “택시를 타면 기사들이 나를 알아보고 ‘왜 정치를 해서 이미지를 더럽히냐’고 말리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정치판에 뛰어들어 자신이 쌓아온 업적과 이미지가 훼손될까 걱정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최근 “지금은 아니지만 정치를 할지, 안할지 분명히 밝힐 때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까지 그의 불면의 밤은 계속될 것 같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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