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선정 2006 ‘올해의 인물’ 故서병길 소방위

  • 입력 2006년 12월 28일 03시 05분


《“아버지 떠나시고 보름 뒤에 아기가 생긴 걸 알았어요. 생전에 그렇게 바라시던 손자인데….”

11월 14일 부산 금정구 서2동 가스폭발 사고현장에서 순직한 서병길(57) 소방위. 그가 가족에게 마지막으로 주고 떠난 선물은 ‘생명’이었다. 간호사인 딸 경숙(32) 씨가 아기를 가진 것이다.

하늘에 있는 서 소방위는 새 생명을 통해 가족에게 생전의 다짐을 다시 한번 말하려 했는지 모른다.

“생명을 구할 1%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희망을 버릴 순 없지. 제 목숨 버려 시민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소방관이란다.”》

생애 총 1만9500여 차례 출동해 1052명의 목숨을 구한 서 소방위. 그는 떠났지만 단 하나의 생명이라도 우주로 여겼던 그의 정신은 가족과 동료 소방관의 가슴에 살아 있다.

▶본보 11월 16일자 A2면 참조

▶ “33년 미뤘던 신혼여행 가자더니…” 순직 서병길 소방장

본보는 화재 현장에서 마지막까지 인명을 구하려고 애쓰다 숨을 거둔 서 소방위를 2006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정년퇴직을 한 달 남겨 두고 순직한 서 소방위. 그는 11월 14일 오후 부산 금정구 서2동 주택가 가스폭발 사고현장에 출동했다가 유명을 달리했다. 이날 서 소방위는 무너진 주택 안으로 동료와 함께 들어가 김모(57) 씨와 황모(78·여) 씨를 구출해 냈다.

건물은 “우지직”소리를 내며 곧 붕괴될 기미를 보였지만 서 소방위는 동료들을 먼저 내보낸 뒤 계속 1층 구석구석을 뒤졌다. “안에 세 명이 더 있다”는 고함소리를 들은 것. 언제나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야 한다.’

그러나 오후 8시 7분 건물은 무너졌다. 동료들은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날의 사고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서 소방위 한 사람이었다.

21일 밤 서 소방위의 가족은 돼지 한 마리를 잡아 고인이 생전에 근무했던 금정소방서 200여 명의 직원을 초청해 잔치를 벌였다. 살아 있었다면 22일은 서 소방위의 정년퇴직일이었다. 언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아야 할지 모르는 화재 현장에서 고생하면서도 가족에게는 차마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는 소방관들. 그들은 서 소방위 가족에겐 모두 한 식구였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아들 대식(28) 씨는 “아버지가 떠난 뒤 저희 가족에게 쏟아진 격려와 위로를 꼭 소방가족들에게 되돌려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환경재단은 서 소방위를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77인에 선정했고, 선행칭찬운동본부와 에쓰오일은 소방영웅으로, 한국도덕협회에서는 사회봉사상 대상자로 선정했다.

그러나 쏟아지는 격려와 위로도 졸지에 그를 잃은 가족의 마음을 다 채우지는 못한다. 12월 정년퇴직을 하면 34년 동안 미뤄 뒀던 신혼여행을 떠나자며 8월 남편과 함께 생애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었던 아내 황천임(59) 씨. 그는 “지금도 저녁이면 ‘여보’ 하고 남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것만 같다”고 말했다. 황 씨는 자식들에게 불쑥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며 흐느끼기도 한다.

“지난밤 꿈에 너희 아버지를 봤다.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더라. 저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가족은 일요일마다 경남 합천군 해인사의 암자인 길상암에서 재를 지내고 있다. 아들 대식 씨는 “새해 1월 2일 49재가 끝나고 어머니의 상처가 아물면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가겠다”고 말했다.

‘불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부디 편히 쉬십시오. 마음 편히 쉬십시오. 남아 있는 우리는 아버지가 실천하신 명예와 희생정신을 마음 깊이 간직하렵니다.’

49재 때 아들 대식 씨가 아버지에게 띄울 편지 한 토막이다.

부산=조용휘 기자 sile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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