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이 두 번 변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민주화의 물꼬를 튼 박 씨의 이름 석 자는 희미해져 가고 있지만 여전히 박 씨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건이 발생한 1987년 1월 14일과 이튿날인 15일 이틀 동안 사건 지휘를 맡았던 최환(64·사법시험 6회)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박 씨 사건 발생 직후 경찰이 시신을 화장해 사건을 은폐하려는 시도를 막아냄으로써 ‘고문치사’ 사실을 밝히는 데 숨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이 밝혀져 1987년 민주화 항쟁의 봇물이 터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는 자신이 했던 일을 떠벌리지 않았다.
9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사무실에서 본보와 단독 인터뷰를 가진 최 변호사는 1987년 1월의 그 긴박했던 이틀을 다시 떠올리며 “지금 제도권에 들어가 있는 민주화운동 했다는 사람들, 그런 식으로 하라고 박종철 열사가 몸을 바쳤느냐”고 일갈했다.
“박종철 열사는 몸으로 민주화를 실천했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 혜택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을 해서 지금 정치권이나 정부 요직에 들어온 사람 중 일부는 과거에 주사파의 헛된 논리를 맹신하고 다닌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도 당시에 민주화운동 했다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예전의 순수한 민주화운동을 이용하려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최 변호사는 20년 전 그날을 바로 어제인 듯 생생히 기억했다.
“그날 유난히 추웠어요. 직원들 모두 일찍 퇴근하고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데 당시 치안본부 대공수사2단 경찰관 2명이 찾아왔죠.”
1987년 1월 14일 오후 7시 40분경, 서울지검을 찾아온 경찰관 2명은 A4 용지 2장짜리 ‘변사보고’ 문건을 내밀었다. 박 씨의 간단한 인적사항과 함께 “수배 중이던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묻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해 조사하는데 계속 행방을 모른다고 하기에 ‘왜 뻔한 걸 부인하느냐’고 큰 소리를 치며 ‘탁’ 하고 책상을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최 부장은 박 씨의 죽음에 고문이 개입됐음을 직감했다.
“사망한 지 8시간이 지나서야 경찰이 보고한 점도 수상했고, 170cm의 키에 몸무게 60kg이 넘는 건장한 청년이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는 점도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1년 전 터졌던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떠올랐어요.”
경찰이 박 씨의 부모에게서 받아왔다는 ‘화장 동의서’는 최 부장의 의심을 더욱 깊게 했다.
“시골에서 어렵게 공부 가르쳐 서울대에 보낸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면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려는 것이 부모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시신도 안 보고 화장에 선뜻 동의하겠다니, 그럴 부모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 부장은 “혹시라도 가혹행위가 있었으면 솔직하게 얘기하라”고 경찰관들을 다그쳤다. 그러나 경찰관들은 “의사 3명에게서 쇼크사라는 소견서를 다 받았다”고 딱 잡아뗐다.
“‘그러면 부검해도 되겠네’라고 떠봤습니다. 그랬더니 경찰관들이 ‘부검은 가족이 반대하니 무조건 도장만 찍어 달라’고 우기더군요.”
이때부터 ‘화장할 수 있게 변사보고에 도장을 찍어 달라’는 경찰과 ‘그렇게는 못한다’는 최 부장 간의 실랑이가 시작됐다. 2시간여 옥신각신이 계속되자 경찰관 한 명이 슬그머니 밖으로 사라졌다. 어딘가로 ‘SOS’를 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최 부장의 전화통에 불이 났다.
○청와대, 안기부, 검찰 잇따라 전화
“첫 전화는 청와대 고위층이었습니다. 그날 밤 받은 전화가 30통은 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청와대의 사정·민정수석실은 물론이고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의 고위층에서도 전화가 빗발쳤다. 내용은 한결 같았다. “그냥 사인해 주라”는 것이었다. 부장검사에서 바로 검사장이 된 사람도 있는데, 이번 건을 잘 처리하면 바로 검사장이 될 수 있다고 회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검찰 고위층 인사 한 사람은 ‘이××, 내가 너 같은 놈을 믿고 공안부장 자리에 앉혀 놓은 게 천추의 한’이라며 분을 참지 못해 욕설 섞인 전화를 하더군요. 정구영 당시 서울지검장을 빼고는 윗선의 여러 명이 전화를 걸어 왔어요.”
전화 공세에 시달리던 최 부장은 경찰관들에게 “내일 관할 용산경찰서를 통해 변사사건 처리 보고서를 올리면 처리해 주겠다”고 달래서 돌려보낸 뒤 귀가해서는 집의 전화선을 뽑아 버렸다.
이튿날 아침 일찍 출근한 최 부장은 정 검사장에게 “틀림없이 고문사다. 부검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정 검사장은 당시 형사부 당직이었던 안상수(현 한나라당 국회의원) 검사에게 부검 지휘를 맡겼다.
“그런데 오전에 영장을 발부받아 부검 현장으로 떠난 안 검사가 오후 4시가 지나서야 ‘경찰이 시신을 내주지 않아 부검을 못하고 있다’고 보고하더라고요. 기가 막혀서 당시 박처원 치안본부 대공수사처장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박 처장 말이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내주지 말라고 한다’는 겁니다.”
최 부장은 곧장 강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 본부장의 일성은 “당신 말이지, 다된 걸 왜 자꾸 긁어 부스럼을 만들려고 해”라는 호통이었다.
강 본부장은 당시 정권의 핵심 실세였다. 최 부장은 지지 않고 “법관의 영장을 받아서 부검을 하려는데 이를 방해하면 특수공무집행방해 및 검시방해 혐의로 현행범이 될 수 있다”고 맞받아쳤다.
긴 실랑이 끝에 마침내 한양대병원에서 박 씨의 부검이 시작됐다. 밤늦게 안 검사에게서 보고가 왔다.
“고문으로 죽은 게 틀림없답니다. 그것도 물고문입니다.”
○“나는 공안부장으로서 할 일 한 것뿐”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잡아넣던 공안검사지만 최 변호사는 인터뷰 내내 박종철 씨를 ‘열사’라고 부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박종철 열사는 순수하게 민주화운동을 했다. 수배 중인 선배에 대한 신의를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분으로 그의 죽음은 민주화의 초석이 됐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 시절 정권 안보를 위해 정권과 공안당국이 공생관계에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는 공안부장으로서 할 일을 해야 했습니다. 만일 그날 그냥 화장 동의서에 도장을 찍어 줬다면 지금 내가 교도소에 가 있을 수도 있고…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 됐겠죠.”
장택동 기자 will71@donga.com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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