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오징어잡이배 '천왕호' 사무장이었던 최 씨는 1975년 8월8일 어로 작업을 하던 중 32명의 동료 선원들과 함께 북한 경비정에 나포됐다.
북한 당국은 피랍 직후 천왕호를 압수했으며 선원들은 1년 간 원산 62연락소에서 '적응 교육'과 정치 학습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당국에서는 "지금 당신들이 내려가면 모두 죽는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최 씨를 포함한 선원들은 귀환을 요구하는 단식투쟁과 자살 소동까지 벌였다. 이들은 결국 1년 간의 '단체생활' 뒤 북한 각지로 흩어졌다.
최 씨는 함경북도 김책시 풍년리에 있는 남새(채소) 농장에 배치됐으며 당국의 감시 속에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했다.
최 씨의 소식이 남녘에 알려진 것은 1998년 그의 편지가 국내 납북자단체에 전해지면서부터였다. 최 씨는 당시 형님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새와 물고기는 남북을 자유롭게 오가는데 나는 왜 못 가나…. 참 분통하다"고 하소연했다.
납북자단체가 최 씨와 동료 선원 고명섭(2005년 입국) 씨의 편지를 함께 공개하면서 2000년 천왕호 선원 전원이 정부의 납북자 명단에 추가됐다. 1999년까지는 선장 김두익 씨만 명단에 올라 있었다.
부인 양정자(66) 씨는 이후 남편의 송환 운동을 꾸준히 벌였으며 납북자단체는 북한에 은밀히 중개인을 보내 최 씨의 탈북 의사를 타진했다.
중국으로 탈북한 최 씨는 2001년부터 8차례 탈북을 권유받았지만 '북한 당국이 나를 떠보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에 4차례나 보위부에 신고했다고 밝혔다.
최 씨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9월 아홉번째 탈북 권유를 받으면서였다. 당시 최 씨는 "남녘 우리 아이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써오면 믿겠다"고 말했고, 부인 양 씨가 써보낸 1남3녀의 이름과 음력생일을 받아본 뒤 "나올(탈북할) 의향이 있다"고 전해왔다.
그의 결심 후 탈북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최 씨는 지난해 12월22일 아침 북녘 가족들에게 "시내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이어 조선족 안내원이 마련한 화물차 짐칸에 몸을 싣고 3일 만에 혜산으로 이동, 같은 달 25일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 옌지(延吉)의 은신처까지 10여 개의 검문소를 맞닥뜨렸지만 안내원이 미리 마련해둔 여행증명서 등 서류로 무사히 통과했다.
최 씨는 그러나 은신처로 오는 길에 차량이 눈길에 미끄러지는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쪽 이마를 8바늘 꿰매는 수술도 받았다.
그는 은신처에 도착한 다음 날인 12월26일 서울에 있던 부인 양 씨와 통화했고 같은 달 31일에는 중국 현지에서 31년만에 상봉했다.
부부는 3일을 같이 보내면서 선양(瀋陽) 한국총영사관에 전화해 신변안전과 한국으로 송환을 요청했으나 담당 직원으로부터 번호를 알게 된 경위를 질문받는 등 '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지난 4일 최 씨의 탈북 사실이 국내 언론을 통해 알려졌고 다음날 선양 총영사관은 납북자단체로부터 그의 신병을 인도받았다. 중국 공안당국은 6일 최 씨를 인계해 납북어부가 맞는지 여부, 북한 탈출 경위 등을 조사했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은 11일 필리핀 세부에서 리자오싱(李肇星) 중국 외교부장을 만나 최 씨가 조속히 귀환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했고 리 부장은 "관련 법 절차를 최대한 단축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양국 간 귀환교섭이 급진전됐고 최 씨는 마침내 16일 오후 2시15분 대한항공 KE832편으로 선양을 떠나 오후 4시5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디지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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