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4호선 회현역에서 내려 남산으로 난 오르막길을 따라 15분쯤 걸으면 서울 중구 회현동의 제2시민아파트에 이른다.
1970년 5월 준공된 이 아파트는 현존하는 서울 최고(最古) 아파트. 1964년에 건설된 마포아파트 등 앞서 지어진 것들이 있긴 하지만 재개발, 재건축으로 허물어지고 건축 당시 모습 그대로 남은 것은 이 아파트가 유일하다. 10층 높이에 ‘ㄷ’자 모양의 아파트에는 현재 352가구가 살고 있다.
시민아파트는 서울 산중턱 곳곳의 판잣집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1968년 서대문 금화아파트를 시작으로 몇 년 사이에 32개 지구 434개 동이 들어섰다.
아파트가 없던 시절 시민아파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근대화 상징’이었다. 그러나 1970년 4월 33명이 숨진 마포 와우아파트 붕괴사고가 나면서 1971년부터 1977년까지 101개 동이 철거됐고 1997년 ‘시민아파트 5개년 정리 계획’에 따라 나머지 시민아파트도 정리됐다.
지금은 ‘흉물’이라고 구박받지만 준공 당시에는 나무 마루와 수세식 화장실, 중앙난방장치 등을 갖춘 최신식 아파트였다. 이를 탐낸 부유층들은 입주 자격이 없어도 편법으로 입주권을 사기도 했다.
입주 때부터 이곳에 살아온 신광윤(84) 씨는 “입주금 150만 원을 매달 몇 천 원씩 20년간 상환하는 조건이었는데 그것도 벅찬 사람은 부유층에 입주권을 팔았다”며 “허가 과정에서 경찰과 공무원에게 아파트를 헌납해 주민 중에는 높은 ‘어르신’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KBS가 남산에 자리 잡고 있던 시절이라 PD가 많이 살았고 연예인들이 눈도장을 찍고 가는 모습도 자주 목격됐다고 한다. 가수 윤수일과 은방울자매,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 시민운동가인 백기완 선생 등도 한때 이 아파트 주민이었다.
아파트 화단에는 지금도 장독 50여 개가 윗부분만 고개를 내민 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앞마당이 없어 공용 화단에 하나둘 묻기 시작한 장독을 두고 김장김치를 꺼내 먹는 겨울이면 서로 “내 장독이다” “이사 간 아무개가 물려주고 갔다”며 언쟁하는 풍경도 흔했다.
이 아파트에서는 지금도 관리비를 계좌이체가 아닌 경비실에서 직접 받는다. “그냥 그렇게 해 왔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다. 한 달 기본 관리비 2만350원을 체납해도 눈감아 주고 그 대신 이동통신사 몇 군데에 안테나 설치 공간을 빌려 주고 받는 돈으로 충당한다.
그러나 주민 윤태성(58) 씨는 “시민아파트의 분위기가 요즘 들어 많이 변했다”고 한다. 철거설이 돌던 2년 전부터 집값이 뛰어 원주민 대부분이 집을 팔고 떠나 입주 때부터 살던 주민은 이제 10여 가구만 남았다.
요즘 이 아파트는 아파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손님’들로 북적댄다. 2004년 정밀진단에서 D등급을 받아 곧 철거될 예정이기 때문. 머지않아 서울 시민아파트의 모습은 영화나 사진 속에서만 볼 수 있게 될 것 같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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