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군은 한국식 공부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학교 수업시간은 가볍게 여기고 학원과 참고서를 이용한 자습을 중시했다. 수업시간의 토론과 참여, 팀워크를 중시하는 미국식 교육환경에서는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려웠다. 김 군은 그동안 주말마다 한국에서처럼 워싱턴 근교의 학원에서 공부해 왔다.
▽한국식 공부와의 차이=워싱턴 근교에서 활동하는 한 대입상담전문가는 “중고교 입학자격 시험(SSAT·Secondary School Admission Test)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한국 학생들이 미국 학교공부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오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10학년(고교 1학년) 때부터 많은 명문 대학들이 요구하는 AP(Advanced Placement·대학 학과목을 고교 때 수강하는 선행학습) 클래스를 들으며 좌절하고 11학년 때는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메우느라 허덕이다 그만 포기해 버리는 예가 많다는 것.
한국 학생들은 특히 엄청난 분량의 독서와 작문을 따라가기가 힘들다는 고충을 자주 토로한다. 애써 작문을 해도 미국 역사와 문화, 가치관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콘텐츠의 빈약’으로 평가받기 십상이다.
페어팩스 카운티 공립학교 자문위원회의 전영완 자문관은 “10학년까지 페이스를 잘 유지하다 11학년에 지쳐 버리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명문대 진학 욕심으로 AP 클래스를 서너 개 이상 신청하고는 과목당 매일 2시간 이상 투자해야 하는 엄청난 과제량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는 것.
▽부실한 교육환경에 처할 위험=18일 오후 워싱턴 근교의 한 사립학교 앞. 학교라기보다는 큰 단독주택처럼 생긴 건물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와 스쿨버스를 탄다. 3분의 1 이상이 한국 학생이다. 중동, 중국계 학생들도 눈에 띈다.
서울 노원구에서 지난해 온 박모(10학년) 군은 “태반이 한국 아이들이고 ESL(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을 위한 수업)클래스는 9학년부터 11학년까지 같이 수업을 듣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도피유학을 온 아이들을 제외하면 다들 어떻게든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서 중위권 대학이라도 갈 수 있을지 고민한다”고 말했다.
박 군도 요즘 다른 사립고교에 편입하기 하루 학원에 다닌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2시간씩 시간당 40달러로 학원비만 월 2000달러가 나간다.
교포 집 지하실에서 홈스테이를 하는 박 군은 “좋은 사립학교는 높은 SSAT 점수를 요구한다”며 “충분한 준비 없이 오면 아이비리그 명문대 진학은 꿈도 꿀 수 없는 환경에 맞닥뜨릴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한국의 일부 유학원에서 소개해 주는 사립학교 가운데는 군사학교, 종교학교도 여럿 있다. 이런 학교들은 시설과 면학 분위기가 나쁘지 않고 학비도 중간수준(워싱턴 일대는 연간 2만5000달러가량)이지만 명문대 진학자가 몇 명이냐고 문의하면 좀처럼 답변을 해 주지 않는다.
교육부 집계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한국 조기유학생 3만5144명 중 35%가 미국으로 향했다. 주재원 자녀나 이민을 제외하면 어머니가 미국 대학에 등록해 유학생비자를 받은 뒤 자녀를 공립학교에 넣는 경우와 아이가 유학생 신분으로 사립학교에 다니는 두 가지로 크게 나뉜다.
혼자 온 학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홈스테이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정하면 낭패를 볼 수 있다.
김모 군은 2년 전 메릴랜드 주의 미국인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했다. 그런데 식사시간에 몇 분만 늦게 가도 식사를 치워 버려 굶기 일쑤였고, 부모님과의 전화는 1주일에 한 번만 허락됐다. 예기치 않은 스트레스가 너무 많으니 공부마저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부모의 높은 기대와 한국적 사고방식도 학생들에겐 큰 심적 부담을 가져다 준다. 한 학생은 “부모님께 ‘미국에선 시험성적만으로 명문대 합격이 결정되는 게 아니다’ ‘학부보다 대학원이 중요하다’ ‘공부 잘하는 미국 아이들도 학비 싸고 내실 있는 주립대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을 드리지만 부모님은 ‘한국과 미국은 다르다. 아이비리그가 아니면 안 된다’며 완강하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진입하기 쉽지 않은 ‘영재교육 트랙’=미국의 교육은 어려서부터 영재를 뽑아 별도로 교육하는 ‘투 트랙(Two track)’ 시스템이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각종 검사를 거쳐 영재로 자라날 소지가 있는 아이들을 GT(Gifted and talented)센터에 모아 교육한다. 같은 학교 안에서 수학 과학 같은 몇몇 과목만 따로 영재교육을 하는 방식도 있다.
미국 부모들은 자녀가 영재반에 들어가지 못해도 별로 괘념하지 않는 분위기지만 한인 사회에는 GT센터 진입을 위한 학원까지 있다. 영재반은 일반 클래스에 비해 수업의 질과 강도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뒤늦게 유학 온 아이들은 이처럼 이원화된 교육시스템에서 ‘영재 트랙’으로 편입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한국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자신 있는 분야인 시험 성적은 입학 사정의 한 요소에 불과하며 일단 최상위권에 들어간 뒤에는 더는 변별력이 없어진다. SAT에서 2300점을 넘으면 우열의 의미가 없다고 본다는 것.
교사의 추천서를 잘 받는 것도 문화적으로 낯선 유학생들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교사가 추천서에 어떤 내용을 썼는지 학생이나 학부모는 절대 알 수 없다. 학생과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그 대학에 진학하기엔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안 써 주거나, 심지어 “귀 대학에 추천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쓰는 일까지 있다고 한 학교 관계자는 전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전문가 조언▼
“문제 잘 푸는 테크닉만으론 안 통해”
“리더십-독창성-열정 등 두루 갖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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