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토리라인
제3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구.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리브리아’라는 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총사령관으로 불리는 독재자가 지배하는 이곳 사람들은 ‘프로지움’이라는 약물을 정기 투약해야 합니다. 프로지움은 사랑 증오 분노와 같은 인간의 감정을 없애 버리는 약이죠.
주인공 ‘프레스톤’은 총사령관의 방침에 반대하는 반역자들을 처단하는 임무를 맡은 특수요원입니다. 반군의 아지트를 급습해 즉결 처분하고, 시집이나 그림 음반처럼 인간 감정을 활성화시키는 물건을 태워 없애 버리는 냉혹한 인물이죠. 우연히 프로지움의 투약을 중단하게 되면서 인간적인 감정을 회복해가기 시작한 그는 결국 총사령관에게 총구를 돌립니다.
[2] 주제 및 키워드
영화의 제목 단어인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은 ‘마음의 평정’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무척 역설적입니다. 약을 통해 인간은 마음의 평정을 이룰지 모르지만, 동시에 인권과 개성을 빼앗긴 채 독재자의 꼭두각시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여기서 떠오르는 영화의 키워드는 ‘feel’, 즉 ‘인간의 감정’입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는 능력(감정)을 거세당한다면, 아무리 전쟁 없이 평화로운 삶을 살지라도 그건 진정 ‘인간다운 삶’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생각을 여기서 멈추지 마세요. 영화는 ‘인간의 감정’ 못지않게 중요한 단어 하나를 더 숨기고 있습니다. 바로 ‘자유(freedom)’죠. 과거 주인공이 사살했던 동료가 유품으로 남긴 사진의 뒷면에 쓰여 있던 바로 그 단어, ‘자유’ 말입니다.
주인공의 투쟁은 일견 ‘인간의 감정’을 되찾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행위입니다. 주인공은 그것이 평화이든 아니면 전쟁이든(물론 평화면 더 좋겠습니다만), 자기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갈망했던 것이니까요.
[3] 더 깊게 생각하기
영화 속 독재자는 말합니다. “위대한 발명품 프로지움은 감상과 슬픔과 미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해방’이라는 단어가 가진 빛과 그림자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들은 프로지움이란 약을 통해 미움 슬픔 분노의 감정으로부터 ‘해방’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진짜 해방이었을까요? 감정으로부터 ‘해방’된 인간들은 다시 독재자에 의해 조종되면서 획일화되고 비인간화되어 갑니다. 무엇인가로부터 ‘해방’되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무엇인가에 ‘예속(억압)’될 수 있다는 얘기죠.
휴대전화를 예로 들어 볼까요? 우리는 휴대전화를 통해 장소라는 한계(혹은 억압)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덧 우리는 휴대전화 없이는 단 1초도 살 수 없는 삶을 살게 되었죠. 휴대전화가 고장 나기라도 하면 친구들과 소통할 방법을 잃은 우리는 졸지에 외톨이가 되어 버립니다. 이렇듯 기술문명의 발달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해방’과 동시에 교묘한 ‘구속’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4] 뒤집어 생각하기
“이 세상에서 전쟁을 없애기 위해 분노와 같은 인간적 감정은 무자비하게 제거돼야 한다”는 영화 속 독재자의 주장은 ‘폭력의 아이러니’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폭력을 뿌리 뽑기 위해 또 다른 폭력을 사용한다? ‘더 큰 폭력’(전쟁)을 막기 위해 ‘작은 폭력’은 불가피하다? 이런 주장은 “사랑하기에 헤어진다”는 연인들의 말만큼이나 무책임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입니다.
이런 ‘폭력의 아이러니’는 주인공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됩니다. 프레스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화려한 솜씨로 자신을 둘러싼 수십 명의 사람을 해치우는데요. 그의 이런 행위는 분명 ‘무자비한 폭력’입니다. ‘폭력을 근절한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폭력을 일삼는 독재자를 처단하기 위해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을 동원한다’는 것이 합리화될 수 있을까요?
여러분, 프레스톤에게 인간 감정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여성 메리는 말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분노나 슬픔이 없다면, 인간이 숨쉬는 건 시곗바늘이 내는 소리와 다를 바 없어요.”
그렇습니다. 미워할 수 있다는 건, 화낼 수 있다는 건, 우리가 살아 있다는 소중한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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