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산부인과병원 의사 이모 씨가 김 씨의 박사학위 논문을 영어로번역해 미국 생식의학회지에 2005년 2월 기고하면서 문제가 벌어졌다. 이 씨가 제1저자인 김 씨의 이름을 빼고 A 씨의 이름을 넣은 것.
논문을 도용당한 김 씨는 자신이 국내 학회지에 게재한 논문이 되레 A 씨의 논문을 ‘표절’했다는 오해를 받게 되자 이 씨를 고소했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해 12월 이 씨를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이는 논문 표절이 형사 사건으로 번진 드문 사례다. 최근 학계와 문화 예술계에서 표절 시비가 자주 일고 있지만 형사 사건으로 비화하는 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다.
검찰 관계자는 “논문 표절은 친고죄인 탓에 간혹 고소가 있더라도 당사자끼리 합의하면 중간에 사건이 끝나기 때문에 기소되는 사례가 1년에 한 건이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라며 “그래서인지 표절사건에 대한 통계는 물론 일정한 처리 기준조차 없다”고 말했다.》
○ 애매한 잣대, 관대한 판결
모 대학 L 교수는 학교 자체 조사에선 표절 판정으로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았으나 지난해 12월 대법원에서 표절 의혹을 벗었다.
대법원은 “L 교수의 저서가 적게는 한두 쪽에서 많게는 30∼40쪽 분량을 연속해서 타인의 저서를 인용하고 있어, 정당한 범위 안에서 공정한 관행에 합치되게 인용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법원은 “각 저서의 해당 부분이 원 저서를 인용했음을 독자가 알 수 있을 정도로 출처를 머리말 등에 표시했다”며 “이 같은 출처 표시 방식이 충실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표절에 해당한다고 평가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머리말 등에 밝힌 짤막한 ‘인용 표시’로 법적으론 표절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아낸 셈이다. 문장이나 특정한 단어를 인용할 때마다 각주에 이 사실을 밝혀야 하는 학계의 기준과는 큰 차이가 있다.
한 논문을 여러 학술지에 그대로 싣는 ‘이중 게재’도 학계에선 논란이 되지만 법적 처벌 대상은 아니다. 이중 게재를 통해 자격 심사나 연구비를 받았을 때 업무방해 혐의로 처벌받는 사례가 간혹 있을 뿐이다.
학습교재의 표절은 종종 형사재판으로 이어지지만 대부분 벌금형에 그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은 중국어 번역 연습서에 담긴 지문과 문제 일부를 베낀 교재를 출간해 판매한 혐의로 기소된 Y사 대표에게 최근 벌금 700만 원을 선고했다. ‘한국어능력시험’이란 교재를 발행하면서 부록에 모 방송사가 실시한 시험 문제를 동의 없이 베낀 혐의로 기소된 출판업자는 지난해 7월 벌금 1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손해배상액도 그리 많지 않다. 막대한 소송비용에 비해 배상액이 적어 아예 소송을 포기하는 일도 적지 않다.
지난해 10월 가수 MC몽이 부른 ‘너에게 쓰는 편지’의 작곡가가 록그룹 더더의 ‘이츠유’라는 곡의 저작권을 침해한 사건에서는 1000만 원의 배상판결이, 지난해 3월 가수 김성술(예명 김해일·1971년 사망) 씨의 어머니 강모 씨가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작곡가 황선우 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선 배상액이 3000만 원이었다. 이 두 사례는 유사 사건과 비교하면 배상액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었다.
○ 더는 무풍지대 아니다
법무법인 신우 표종록(저작권법 전문) 변호사는 “인터넷과 미디어 발달로 국내의 저작권 침해 상황을 외국 저작권자들이 예전보다 쉽게 알 수 있게 됐다”며 “이는 저작권 환경 변화에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검이 베스트셀러인 번역서 ‘인생수업’을 펴낸 출판사의 대표를 최근 불구속 기소한 사건은 저작권 침해 분쟁에 국경이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출판사는 책 표지와 본문 등에 캐나다 사진작가 그레고리 콜버트 씨의 작품을 허락을 받지 않고 사용했다가 콜버트 씨가 한국 검찰에 형사고소를 하고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내자 지난해 말 삽화를 완전히 바꾼 뒤 새로 책을 냈다.
한국은 1996년 ‘문학 및 예술 저작물 보호에 관한 국제협약(베른협약)’에 가입했다. 이 때문에 한국은 이 협약에 가입한 150여 국가의 저작물을 한국인의 저작물과 동등하게 보호해야 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도 저작권 문제는 첨예한 쟁점이다. 미국은 국내 저작권법은 물론 베른협약, 세계무역기구(WTO) 무역 관련 지식재산권협정 등에서 50년으로 규정된 저작권 보호 기간을 70년으로 연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저작권법인 ‘소니보노법’이 저작권 보호 기간을 저작자 사후 70년으로 규정하고 있어 한국도 미국과 형평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연세대 남형두(저작권법·법무법인 광장 변호사) 교수는 “국제적으로 저작권 보호를 둘러싼 법률 환경이 갈수록 엄격해지고 있다”며 “한국도 국제적인 저작권 분쟁에 서둘러 대비하고 표절을 막아야 한다는 확고한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선 당사자 고소 없이도 처벌▼
미국은 한국과 달리 당사자의 고소가 없이도 표절을 비롯한 저작권 침해 행위를 수사하거나 처벌할 수 있다. 다만 저작권의 특성상 제3자의 고발이나 수사기관의 적발로 표절 행위를 처벌하는 사례가 드물 뿐이다.
저작권 침해 피해자들은 형사 처벌보다는 민사 소송으로 거액을 배상받으려 한다. 미국의 대부분 주(州)에선 영리 목적이 아니거나 피해액이 1000달러를 넘지 않으면 표절을 했더라도 형사처벌을 하지 않는다.
미국은 ‘법정 손해배상제도’가 있기 때문에 실제 손해액보다 더 많은 금액을 배상받을 길이 열려 있다. 저작권 피해자가 손해를 입증하기 어려울 때 법원이 재량으로 적절한 보상을 해 주기 위한 제도다. 한국은 실제 손해액을 배상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지만 법정 손해배상제도는 대략 실제 손해액의 3배가량을 배상한다.
2003년 10월 볼티모어 주 연방 지방법원은 증권사인 레그 메이슨사에 저작권 침해를 이유로 로리 리포츠사에 1970만 달러(약 180억 원)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레그 메이슨사는 1년에 700달러를 주고받은 로리 리포츠의 ‘로리 시장 흐름 분석’ 소식지 중 한 부를 복사해 팩스와 e메일 등을 통해 1300명의 레그 메이슨사 증권 중개인과 고객들에게 배포했다.
당시 레그 메이슨사는 “실제 피해액은 5만9000달러에 불과하다”고 항변했지만 이 같은 행위를 징벌한다는 의미에서 거액의 배상판결이 내려졌다. 레그 메이슨사는 로리 리포츠사에 1250만 달러의 합의금을 주는 선에서 소송을 끝냈다.
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표절이나 저작권 침해 범죄를 친고죄로 다룬다. 하지만 인용하는 글의 출처 표시 의무를 어기는 것은 공공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보고 ‘비친고죄’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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