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한국’이젠 바로잡자]<6>‘음해성폭로전’멍드는상아탑

  • 입력 2007년 2월 27일 02시 52분


《서울의 한 대학에서 같은 학과 교수끼리 논문 표절 폭로전이 벌어져 법정까지 간 적이 있었다. 보직을 놓고 경합하던 A 교수가 동료 B 교수의 논문 가운데 표절로 의심되는 내용을 찾아내 폭로했다. 그러자 B 교수도 A 교수의 논문을 샅샅이 뒤져 표절 의혹을 폭로하는 ‘맞불 작전’을 폈다. 두 사람의 관계가 험악해지고 학과 분위기는 엉망이 됐다.

이처럼 잇따라 제기되는 대학교수들의 표절 의혹은 학문적 관심사에서 비롯되기보다는 총장 선거, 보직 배정, 교수 간의 갈등, 교내 구성원 간의 불협화음 때문에 불거지는 사례가 적지 않다. 표절 의혹이 제기되면 ‘폭로전’ 양상으로 치닫기 일쑤다. 건전한 학문적 검증 및 토론, 엄정한 연구윤리를 통해 드러난 상처를 치유하고 발전의 전기로 삼는 지혜는 찾아보기 힘들다.》

▽문제 제기 배경부터 대립=지난해 8월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가 논문 표절 의혹으로 낙마한 이후 표절 문제는 학계에서 ‘양날의 칼’이 됐다. 잘못된 연구 관행을 반성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상대방을 공격하는 효율적인 무기로도 인식돼 파벌과 음모 등 학계의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총·학장선거가 학내 구성원 직선으로 치러지면서 상아탑에서 표를 얻기 위한 ‘정치판’의 양상이 벌어진다. 상대 후보의 약점을 찾아 폭로하거나 보직에서 소외된 교수가 상대의 치부를 들추기도 한다. 교수 임용에서 떨어진 뒤 투서나 제보 등을 통해 임용된 교수의 표절 의혹을 폭로하는 사례도 많아졌다.

교육인적자원부의 한 관계자는 “해마다 1, 2월 교수 채용 시기에는 100여 건의 투서나 제보를 받는데 최근 표절에 관련된 제보가 점점 늘고 있다”고 밝혔다.

논문지도 과정에서 교수와 마찰을 빚은 대학원생이 지도교수의 표절을 폭로하기도 하고 학생들이 총장의 책에서 표절 부분을 밝혀내 학습권 침해에 대한 소송을 낸 사례도 있다.

전문가들은 표절을 학문적으로 엄정하게 논의하기 위한 통로나 표절 척결에 대한 해당 기관의 의지가 부족해 이런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대학, 학회, 교육 당국엔 표절 의혹을 건전하게 다룰 위원회가 없다. 보통 표절 의혹은 해당 사안만 종결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식으로 흐지부지된다. 김 전 부총리의 표절 의혹도 학문적으로 판정되지 않고 끝났다. 이 때문에 표절 의혹 당사자나 대한 제재나 처벌이 이뤄지는 일도 극히 드물다. 제기된 논란에 대해 명확한 판정이나 판단이 내려지지 않기 때문에 표절에 대한 기준도 세우기 힘들어진다.

아주대 독고윤(경영학부) 교수는 “표절 문제에 떳떳하지 못한 사람들이 표절 의혹이 제기되면 음모론 등으로 몰아가 문제의 본질을 흐릴 때가 많다”며 “표절 문제를 학문적으로 공론화하고 토론하는 장을 상설화해야 연구윤리가 확립된다”고 말했다.

▽학계의 파벌 문화=표절 폭로전은 학계의 파벌 문화를 잘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다. 이러한 문화가 표절을 조장하기도 하고 표절 의혹을 덮어주기도 한다.

교수 임용 과정에서 자신이 유학한 대학 출신이나 같은 지도교수 밑에서 공부한 사람을 추천하고 이를 통해 영향력을 키워 나가는 것이 한국 학계의 관행이다. 특정인의 강력한 추천에 힘입어 임용된 사람은 그 사람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고 공동저작 논문을 양산하면서 세력을 다져 나간다.

서울의 한 대학교수는 “임용 과정에서 교수들 간의 보이지 않는 알력이 표절 의혹 제기로 표출되기도 한다”며 “교수들이 자기가 추천한 사람이 임용되도록 로비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말했다.

이런 풍토에선 일부 교수가 기존 논문을 쪼개거나 덧붙여 제출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제자의 논문을 재활용해 논문을 쓰거나 연구 성과를 공유하더라도 내부 고발자가 나오기 힘들다. 여기에 교수 사회의 성과중심주의까지 겹쳐 짜깁기를 하거나 급조된 논문이 나오더라도 서로 봐주기 의식이 있으면 아무런 제어를 받지 않게 된다.

전문 분야인 학계는 대중문화계와 달리 일반인에 의해 표절 논란이 제기될 개연성이 거의 없다. 내부의 제어 장치와 표절 근절 의식이 없는 한 표절은 사라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학문적 발전도 기대하기 힘들다.

▽과오부터 인정해야=표절 의혹이 제기되면 당사자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당사자들이 표절 의혹을 교수 집단 간의 정치적 대립으로 생각할 뿐 윤리 문제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한 대학교수는 “제자의 시 도용 의혹이 제기되자 ‘내가 미쳤었나 보다’라며 잘못을 시인한 마광수 연세대 교수는 용감한 편에 속한다”며 “대부분의 교수가 연구윤리 부정에 대해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아 후학에게도 악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음해성 폭로전의 악순환이 계속되면 표절에 대한 기준이 확립되지도 않은 채 서로 상처만 입어 학계가 황폐화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고려대 강선보(교육학과) 교수는 “서로 다른 기준으로 잘잘못을 따지고 논란을 빚기보다는 정부나 학회 차원에서 통합 지침과 검증 절차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빈약한 학내 검증 시스템

대학 93% 처벌 규정도 없어

해외학계 ‘한국 무시’ 부채질

선진국의 대학이나 학회는 윤리 규정을 위반하면 엄격히 제재하지만 국내에선 연구윤리 규정조차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위촉한 ‘연구윤리확립추진위원회’는 전국 218개 대학과 280개 학회의 연구윤리 실태를 조사한 결과 연구윤리 관련 위원회를 둔 대학은 28개(12.8%), 학회는 14개(5%)에 불과했다. 연구부정행위 처리 규정은 15개 대학(6.9%)과 70개 학회(25%)만 갖고 있다. 이 규정의 50.3%가 2005년 이후 제정됐다.

국내에선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논문조작 사건 이후 연구윤리 기구나 규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서울대는 지난해 6월 ‘연구진실성위원회’를 설치해 ‘위조’ ‘변조’ ‘표절’을 연구부정행위로 규정하고 서울대 구성원의 부정행위를 조사할 수 있도록 했다. 포스텍(포항공대),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한양대 등도 연구윤리위원회를 갖고 있다.

한국행정학회는 2005년 12월 국내 학회론 처음으로 표절 관련 규정을 제정했다. 행정학회는 표절이 확인된 저자 및 논문에 대해 행정학회보에 5년 이내 기고 금지, 행정학회 홈페이지와 행정학회보에 표절 사실 공시, 표절 가담자의 소속 기관에 통보 등 제재 조치를 마련했다.

서울교대 이인재(윤리교육과) 교수는 “학회는 표절에 대한 징계 수위가 낮아 대학이 적극적으로 표절 당사자를 제재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의대 서유헌 교수는 2002년 9월 약리학 학술지인 ‘파머콜러지컬 리뷰’에 게재한 논문에서 따옴표 없이 다른 논문의 한 대목을 인용했다가 지난해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

서 교수는 “내가 먼저 연락해 수정 내용을 학술지에 실었지만 학술지 측의 편집 실수로 드러났다”면서 “학술지 측은 이런 사실을 공지하라는 요구를 묵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황 전 교수 사건 이후 외국 학술지가 한국 과학자를 불공정하게 대우하고 있어 연구윤리를 엄격히 지키지 않으면 세계적으로 연구 성과를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팀장 이인철 교육생활부 차장 inchul@donga.com

▽국제부 김희경 차장 susanna@donga.com

▽사회부 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교육생활부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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