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한국’이젠 바로잡자]<7>학계 ‘과거 청산’은 어떻게…

  • 입력 2007년 2월 28일 02시 59분


하버드대 대학신문인 ‘하버드 크림슨’이 1988년 정신의학과 셔버트 프레이저 교수의 논문 표절을 보도한 인터넷 기사. 사진 출처 하버드 크림슨 홈페이지
하버드대 대학신문인 ‘하버드 크림슨’이 1988년 정신의학과 셔버트 프레이저 교수의 논문 표절을 보도한 인터넷 기사. 사진 출처 하버드 크림슨 홈페이지
《최근 고위공직자 대학총장 등 사회지도급 인사들의 표절 의혹이 잇따라 불거지면서 과거의 표절을 정리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연구 윤리가 강조되지 않았던 1970, 80년대에 ‘관행’이란 이름으로 이뤄진 행위에 오늘날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 대부분 단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퍼지고 있다.

이 때문에 “수십 년 전에 일어난 일을 끄집어내 유능한 연구자를 흠집 내고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일이 국가적으로 옳으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국가가 일정한 시점을 정해 기업이 과거의 분식회계를 고백하면 이를 처벌하지 않기로 한 것처럼 학계도 과거의 논문 표절에 대해 선을 긋고 가자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학문 윤리에는 ‘공소시효’가 없다”며 표절행위를 엄벌해야 한다는 원칙론도 만만치 않아 공감대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공소시효는 없다’=학계에선 표절을 원칙대로 처리하자는 의견이 많다. 과거에 표절로 만들어낸 논문이 현재 폐기되지 않았다면 표절은 ‘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라는 견해다. 예를 들어 연세대 마광수 교수처럼 문제가 된 책을 전량 폐기처분하지 않는 이상 표절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행위로서 여전히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이다.

서울대 최송화(법학) 교수는 “과거의 연구 업적이 현재도 평가받고 있고 연구 당사자가 그 혜택을 보고 있지 않느냐”면서 “과거의 일이라고 해서 현재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성공회대 이종구(사회과학부) 교수는 “표절 당사자들이 1970, 80년대의 관행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에도 표절을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었다”며 “관행을 내세워 변명하기보다 표절을 솔직히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전상인(사회학) 교수도 “일정한 시점 이전의 표절을 용서해 준다는 식의 접근법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표절 기준의 소급 적용은 무리’=현재의 표절 기준을 과거로 소급해 적용하는 것은 소급입법만큼이나 무리하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학에서 교수들에게 연구 실적을 요즘처럼 많이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논문 작성 방식 등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표절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도 없었다는 것이다.

학문 윤리의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특정 시점을 정해 그 이전의 논문에 대해 문제 삼지 말자는 의견이다. 하지만 이 의견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시점을 언제로 잡느냐는 난제가 놓여 있다.

서울의 한 사립대 교수는 “몇 단어 이상을 무단으로 사용하면 ‘표절’이라는 엄격한 기준을 소급 적용할 경우 무사할 교수가 있겠느냐”며 “대부분의 연구자를 옭아매는 방식으로는 과거의 표절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학계 관행 인정’=관행은 연구 윤리 규정이 없던 시대의 현실 규범이어서 이를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양대 유재원(행정학) 교수는 “과거 논문에 대해 표절 논란이 불거지면 학계 인사들이 주축이 돼서 해당 논문이 작성 당시의 관행 범위를 넘어서는지를 검토해야 한다”면서 “모든 사람들이 100% 같은 의견을 내기는 힘들지만 어느 정도의 의견 일치는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문 분야마다 각기 다른 관행이 있듯이 논문이 작성된 시기에 통용되던 관행에 맞게 논문을 썼다면 표절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같은 학교 이상욱(철학과) 교수도 “제자의 논문을 자기 이름으로 바꿔 제출하는 일은 1970, 80년대의 관행이 아니었다”면서 “‘그땐 누구나 다 그랬어’라는 변명식 관행이 아니라 당시 학문을 같이했던 동시대 학자가 동의하는 수준에서 관행의 범위가 결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논문 자진 철회 기간 설정’=‘마녀사냥’식으로 과거의 잘못을 들춰내 처벌하기보다는 교육당국이 주관해 과거의 연구윤리 부정행위를 고백하고 논문을 자진 철회하는 유예 기간을 두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관행이나 소급 적용을 인정하는 데 따른 부작용을 줄이면서 표절 풍토를 척결하자는 의미다.

학자 자신이 과거를 고백하고 반성한다는 점에서 학계에 주는 충격이 표절 폭로전보다 덜할 수 있다.

한신대 강남훈(경제학) 교수는 “6개월∼1년의 기간을 준 뒤 자기고백 형식으로 표절 논문을 자진 철회하도록 하자”면서 “논문 중복게재 등도 이 기간에 정리하고 자신의 업적에서 자진 삭제하면 된다”고 말했다.

미국과 유럽 등지의 표절 규정도 굵직한 연구나 학문의 부정행위가 사회적 쟁점이 되는 아픔을 겪으면서 점차 정교해져 오늘날의 엄격함을 갖추게 됐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일거에 표절을 추방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학계에 자정 선언의 기회를 주자는 의미다.

한국학술진흥재단 연구윤리정책위원회 위원인 신중섭(윤리교육) 강원대 교수는 “과거의 표절에 매달리기보다 미래의 표절을 예방하는 데 관심을 모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 ‘과거 표절’ 美-유럽대학 대응은

1988년 11월 29일자 미국 하버드대 대학신문인 ‘하버드 크림슨’지에 ‘의대 교수, 표절 시인 후 사임’이란 기사가 실렸다.

이 신문에 따르면 하버드대 정신의학과 학과장이자 맥린병원 병원장인 셔버트 프레이저 교수가 1966∼1975년 발표한 논문 가운데 4편에 대해 표절 의혹이 제기됐다. 한 대학원생은 ‘환상통증(phantom pain)’에 대한 프레이저 교수의 논문을 읽다가 이론적 오류 및 다른 논문과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하버드대 의대 학장에게 이를 알렸다. 의대 측은 이 제보를 흘려듣지 않고 곧바로 교수윤리위원회를 구성해 검증 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프레이저 교수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 등 과학저널에 발표된 논문을 표절한 사실이 들통났다. 그는 결국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20여 년 전의 논문 표절에 대해서까지 엄격한 책임을 묻는 미국 학계의 엄격성을 잘 말해 준다. 후학에게 영향을 미치는 학문에선 ‘공소시효’가 없는 셈이다.

미국과 유럽 등 학문 선진국은 표절에 대한 예방교육에도 열심일뿐더러 과거의 표절에 대해서도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고의성이 없는 표절이거나 자료 인용 표시를 하지 않은 실수도 ‘부주의하고 방만한 연구 태도’로 인한 결과로 보고 책임을 묻는다. 과거 표절 사실이 드러나 사임하거나 처벌을 받은 사례는 많다.

2004년 9월 미국 뉴스쿨대 파슨스디자인학교의 로저 셰퍼드 교수는 워싱턴대 교수의 논문에서 일부분을 표절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퇴했다. 2003년 11월에는 미국 네이벌 아카데미의 역사학과 교수가 저서의 일부분을 4개의 책에서 베껴 썼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대학 측은 조사에 나서 연봉을 1만 달러나 삭감하는 조치를 취했다.

표절 의혹이 불거지면 대학 등 연구기관은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1∼3개월가량 표절 여부를 조사한다. 사안이 중대하거나 표절 논문이 정부의 연구비를 지원받은 결과라면 미국연구윤리국(ORI)이란 국가 기관이 직접 조사하기도 한다.

서울대 의대 김옥주 교수는 “표절 당사자가 저명하거나 정교수 이상이면 학계에 미친 영향력을 감안해 더 엄격히 처벌하는 경향이 있다”며 “연구윤리를 지키지 않고 작성한 논문으로 정부에서 연구비를 받았다면 연구비 지원자격을 박탈하는 등 처벌 수위가 높아진다”고 말했다.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특별취재팀>

▽팀장 이인철 교육생활부 차장 inchul@donga.com

▽사회부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교육생활부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문화부 윤영찬 차장 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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