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다니, 애들은 죄없소… 오래산게 죄지”

  • 입력 2007년 4월 14일 02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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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후 6시 29분. 경찰이 112 신고를 접수했다. “서울 중구 주교동 방산시장입니다. 전 경비원인데요. 할머니 한 분이 여기 앉아 계세요.” 길을 잃은 것으로 보이는 짧은 백발의 할머니 옆엔 요구르트 한 병과 옷가지 몇 벌이 조금씩 나뉘어 담긴 쇼핑백 2개가 함께 놓여 있었다. 경찰은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82)에게서 “아들 둘에 딸 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연락을 취했지만 이들의 휴대전화는 모두 꺼져 있었다. 집 전화도 받지 않았다. 일단 이날 밤 경찰은 갈 곳 없는 할머니를 따뜻한 방이 딸린 인근 경찰 지구대로 옮겨 재워 드렸다.》

이튿날 아침에서야 경찰은 가까스로 큰딸(50)과 연락이 닿았다. 딸의 첫마디는 “왜 오빠를 부르지 않고 날 불렀느냐”는 것이었다.

다시 작은아들(53)에게 연락을 취하자 그는 “여동생을 불렀다니 난 안 가겠다”고 말했다.

결국 경찰관 3명이 집까지 찾아가 아들을 임의 동행해 온 끝에 아들 부부와 딸 부부가 경찰서에 모였다.

할머니는 20여 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병으로 큰아들마저 잃은 뒤 딸 둘과 작은아들의 집을 전전해 왔다.

정정한 편에 정신이 맑았던 그였지만 자식들은 늙은 어머니를 서로 모셔 가라며 책임을 떠넘겼다. 3년 전부터는 다툼이 더욱 심해졌다.

급기야 12일, 지난해 11월부터 노모를 부양해 온 큰딸은 이날 오후 3시 40분경 노모의 옷가지를 챙겨 들고 방산시장에 있는 작은오빠의 가게로 찾아가 노모를 맡겼다.

그러나 10분도 지나지 않아 작은아들 부부는 노모를 다시 여동생의 가게로 되돌려 보냈다.

재단사인 작은아들의 가게는 역시 재단사인 큰딸 가게와 50m 떨어져 있다.

여동생은 다시 노모를 데리고 오빠를 찾아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따졌다.

견디다 못한 노모가 작은아들의 가게를 나와 바깥을 떠돌던 중 아들과 딸 부부는 모두 오후 6시경 가게 문을 닫고 퇴근해 버렸다.

갈 곳을 잃고 경비실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노모를 이날 오후 경비원이 경찰서로 보낸 것이다.

이들 남매는 세련된 옷차림에 손가락엔 번쩍이는 보석반지를 끼고 있었고, 경찰 조사 결과 모두 서울에 번듯한 아파트도 보유하고 있었다.

경찰에서 이들은 “서로가 모셔 갔을 거라고 생각하고 집에 간 것이지 어머니를 버린 게 아니다”고 해명했다. 또 뒤늦게 서로 “어머니를 모셔 가겠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은 작은아들과 큰딸 부부 4명을 존속유기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13일 오후 5시경 경찰 조사는 끝났다. 하지만 이들은 마지막까지도 서로에게 “어머니 좀 잘 모셔라”며 욕설과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작은아들의 아내는 시누이에게 “유산을 나눌 때는 아들딸 구별이 없더니 어머니는 왜 아들 보고 모시라고 하느냐”고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이들이 어떤 유산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노모는 경찰서 의자에 앉아 이 모든 상황을 말없이 지켜봤다.

다가간 기자에게 그는 “내가 오래 산 게 죄지 애들은 아무 죄 없다”고 말했다.

“버리다니. 자들은 내보고 이래 가라 저래 가라 안 했심더. 아무 일도 없심더. 자, 이 보소. 이것도 애들이 넣어준 기라.”

할머니는 쇼핑백 속에 들어 있던 요구르트를 손에 쥐고 달게 마셨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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