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선교사로 조선에 온 뒤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광혜원에서 물리 화학을 가르치고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는 등 근대기 의학교육에 공헌한 인물이다.
이 동상이 처음 설립된 건 1928년. 박사의 서거 10주년이 되던 1926년 당시 연희전문 교수였던 유억겸 등을 비롯해 60여 명이 박사를 추모하기 위해 동상 설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박사는 1916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타계했다.
설립 추진 초기에는 조선총독부가 동상 설립에 필요한 기부금 모집을 허가하지 않는 등 난항을 겪었지만 2년 만에 생전의 박사와 똑 닮은 동상이 탄생했다.
이는 서울에 세워진 최초의 동상이기도 했다.
설렁탕 한 그릇에 5전 하던 시절 연희전문의 조선인 교직원 모임인 우애회(1860원), 연희전문학생회(100원) 등 25개 단체와 개화파 정치인이었던 윤치호(200원) 박영효(100원)는 물론 역사학자인 위당 정인보(50원), 국어학자인 외솔 최현배(40원), 동아일보 사장인 인촌 김성수(30원) 등 343명의 개인이 기부에 동참해 모두 4987원31전을 모았다. 높이는 4.8m였으며 제작은 태평통(지금의 중구 태평로) 미술제작소가 맡았다.
그러나 언더우드 동상은 잇단 수난을 겪으며 쓰러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현재 본관 앞에 있는 언더우드 동상은 1955년 제작된 세 번째 작품.
첫 번째 시련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2년에 닥쳤다. 일본이 무기를 만들 동이 부족하다며 동상을 떼어가는 대신 그 자리에 태평양전쟁을 찬양하는 의미를 담아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흥아유신(興亞維新) 기념탑을 세운 것. 당시 떼어낸 동상의 일부는 현재 연세대 기록보존소가 소장하고 있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과 김규식 박사 김구 선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조각가 윤효중 씨가 만든 두 번째 동상의 제막식이 열렸다. 첫 번째 동상보다 크기는 조금 작아졌지만 모양은 같았다.
그러나 이 동상 역시 약 3년 만에 다시 무너진다. 6·25전쟁 중 좌익 인사들이 동상을 밧줄로 묶어 통째로 쓰러뜨렸다는 목격담이 전해지고 있다.
1955년 윤효중 씨가 만든 세 번째 동상은 다행히 반세기 동안 무사히 자리를 지키며 독수리상과 함께 연세대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자리매김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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