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로서의 역사는 객관적 사실, 즉 시간적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모든 과거 사건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는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수많은 과거 사건들의 집합체가 된다.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토대로 역사가가 이를 조사하고 연구하여 주관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교육부 ‘국사’ 교과서]
[TIP] 역사는 역사가가 사실(事實) 가운데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사실(史實)만 골라 재구성한 과거다. 어떤 역사적 기록도 완전한 객관성을 보장할 순 없다. 역사가가 처한 현실과 역사가의 가치관이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료(史料)에 의한 고증을 무시하거나 사료를 왜곡한 역사 기록은 역사로서의 의미가 감소된다. 역사를 읽을 때는 항상 ‘사실’과 ‘기록’의 양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국사 근현대사 등 교과서를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다. |
정체성론은 한국이 여러 정치적·사회적 변화를 겪으면서도 능동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개항 당시 조선 사회가 10세기 말 고대 일본의 수준과 비슷하다는 주장이다. 특히,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데 필수적인 봉건 사회가 형성되지 못하여 사회·경제적으로 낙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파성론은 조선 왕조의 멸망이 당쟁(黨爭) 때문이며, 우리 민족은 파쟁 의식과 분열주의 때문에 발전이 없고 강자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당파성론에서는 조선 시대의 정쟁(政爭)을 학문적 성향과 정치적 신념에 입각하여 분화된 붕당(朋黨)으로 이해하거나 역사 발전 과정상 나타나는 정치·사회적 현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한국인의 부정적 체질과 관련된 생물학적인 문제점이 노출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타율성론은 한국의 역사는 한국인의 주체적인 역량에 의해 전개된 것이 아니라, 중국이나 몽골, 만주, 일본 등 주변 외세의 간섭과 힘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주장이다. 한국사의 반도적 성격론이나 사대주의론도 이러한 타율성론의 산물이다.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TIP] 19세기 말 일본의 한국사 연구는 애초부터 조선 침략을 염두에 두고 시작됐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사 연구도 우리나라를 강점 지배하기 위한 이른바 ‘식민 사관’의 성격을 띠었다. ‘문명개화론’에 입각한 정체성론은 식민지 근대화론(식민지 시혜론)으로 연결되어 한국 강점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됐다. 당파성론과 타율성론도 한국인의 저항 의지를 약하게 만들어서 일제의 강점 지배에 순응하게 만들려는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었다. |
대한제국 시기에 신채호, 박은식 등에 의해 이론의 기초가 만들어진 ‘민족주의 사학’은 1920년대에 이르러 근대 역사학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사회 경제 사학’은 사적유물론(史的唯物論)에 입각하여 우리 민족의 사학과 함께 발전적인 한국사 인식 체계의 하나로 자리잡아 갔다. 백남운 등 사회 경제 사학자들은 한국사를 세계사적 보편성 위에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식민 사학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하였으며,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정신 사관도 비판하였다.
‘실증 사학’은 개별적인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려는 순수 학술 활동을 목표로 삼아 한국사를 실증적으로 연구하려 하였다.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TIP]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한국인의 정신을 강조하는 관념사관(觀念史觀)의 입장에서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강조하였다. 반면 실증주의 사학자들은 사료에 의한 객관적인 고증을 중시하는 ‘사실’로서의 역사를 강조하였다. 사회 경제 사학자들은 마르크스의 유물사관(唯物史觀)에 입각하여, 전 세계적인 ‘역사 발전의 보편적 법칙성’을 강조하였다. 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발전한 근대 한국의 역사학은, 일제강점지배에 저항하는 반(反)식민 사학의 성격이 강했다. |
전지용 최강학원 통합언어논술 대표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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