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혼불’ 배경 종가 화재…93세 종갓집 맏며느리 ‘혼불’로

  • 입력 2007년 5월 16일 03시 12분


소방대원들이 15일 화재가 난 전북 남원시 사매면 삭녕 최씨 종가의 불을 끄고 있다. 목조 건물이라 순식간에 종가 안채가 타 버렸다. 남원=김광오  기자
소방대원들이 15일 화재가 난 전북 남원시 사매면 삭녕 최씨 종가의 불을 끄고 있다. 목조 건물이라 순식간에 종가 안채가 타 버렸다. 남원=김광오 기자
15일 새벽 전북 남원시에서 화재로 숨진 삭녕(朔寧) 최씨 폄재공파 종부(宗婦) 박증순(93·사진) 씨는 마지막까지 종가를 지키며 기품을 유지했던 전형적인 양반가의 며느리였다.

이날 화재로 불에 탄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 삭녕 최씨 폄재공파 종가는 1905년 지어졌으며, 조선 말기 남원 지역 양반가의 몰락 과정과 3대째 종가를 지켜 온 여인들의 삶을 그린 고 최명희 씨의 대하소설 ‘혼불’의 무대이기도 했다.

친척뻘인 작가 최 씨가 이 집에 자주 놀러 왔고 박 씨와 많은 얘기를 나누며 혼불을 집필했다.

최 씨는 이 소설로 단재상 호암상 전북애향대상 등을 받았고 1998년 암으로 숨졌다.

실제 소설 속에서 종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끝없이 겉도는 남편 대신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효원 아씨’의 모델이 박 씨로 알려지기도 했다.

물론 혼불은 픽션이고 실제 박 씨의 살림이 소설처럼 그리 곤궁하지는 않았다.

자녀들은 “어머니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종가를 지킨다며 서울로 모신다는 제의를 번번이 거절했다”고 말했다.

혼불문학관 문화해설사인 황영순(54·여) 씨는 “양반집 마나님의 기품을 지닌 분이었다”며 “몸이 불편해 거의 방에서만 생활했지만 손님이 오면 옷매무시부터 가다듬을 정도로 깔끔하고 학식이 풍부해서 얘깃거리가 무궁무진했다”고 말했다.

18세에 전남 보성에서 시집온 그는 6·25전쟁 때 남편을 잃고 3남매를 키우며 75년 동안 종가를 지켰다.

큰딸 최강희(70) 씨는 “어머니는 보통 사람들과는 확실히 다른 분”이라며 “매일 오전 4∼5시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은 뒤 부엌문을 여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날 불은 목조 기와 건물 5채 중 안채 84m²(25.4평)를 태워 2900여만 원(소방서 추산)의 재산 피해를 낸 뒤 1시간 반 만에 진화됐다.

이 집에서 함께 사는 친척인 박모(80·여) 씨는 “갑자기 불꽃이 ‘딱 딱’ 튀는 소리가 나서 잠에서 깼는데 부엌과 다른 방에서 불길이 솟는 것을 보고 서둘러 밖으로 빠져 나왔다”고 말했다.

경찰은 숨진 박 씨의 방에 있는 변압기 합선으로 불이 난 것으로 추정하고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 중이다. 이 집에는 숨진 박 씨 등 2명만 살고 있었다.

둘째 딸은 이화여대 간호대학장과 16대 국회의원을 지낸 최영희(68) 씨이며 아들 최강원(63) 씨는 서울대 의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발인은 18일 오전 6시 반 서울대병원. 02-2070-2020

남원=김광오 기자 ko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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