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이슈&이슈]동북아 ‘파이데우마’

  • 입력 2007년 5월 22일 02시 56분


20세기 초반에 유럽과 미국은 한 나라와 같았다. 1929년 10월 미국의 주식시장이 무너지자, 그 충격은 고스란히 유럽으로 건너가 엄청난 실업자를 낳았다. 경제가 이미 ‘세계화’되어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 때문에 당시 유럽에서는 앞으로 더는 전쟁이 일어날 리 없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다. 독일 공장에 투자한 프랑스 사람들이 두 나라가 싸우기를 바랄 리 없다. 프랑스에 돈을 쏟은 독일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은 이런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려 버렸다. 유럽의 여러 나라는 엄청난 손해를 무릅쓰면서까지 큰 싸움을 벌였다.

이와 똑같은 불행은 지금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은 경제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다. 하지만 가까운 사이일수록 다툼은 더 자주 일어나는 법이다. 일본이 최신형 전투기를 사려 하자, 우리나라와 중국은 누구보다도 목청을 높였다. 중국은 우리 해군 수색선이 선원을 구하기 위해 자기네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했다. 마치 세계대전 직전 서로 가까우면서도 이빨을 날카롭게 세우던 유럽의 나라들이 떠오른다.

다행히도 이제 유럽에서의 전쟁 가능성은 아주 낮다. 지역감정이 있다 해도,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 유럽에서의 전쟁 걱정은 이 정도 수준인 듯싶다. 그렇다면 유럽은 어떻게 평화로워졌을까?

새뮤얼 헌팅턴은 ‘파이데우마(paideuma)’를 서로 나누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파이데우마’란 한 문명을 문명이게끔 하는 그 무엇이다. 예컨대,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널리 퍼졌지만 중국은 결코 인도가 되지 않았다. 중국을 중국답게 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유럽 역시 다른 문명과 분명히 구분되는 유럽만의 파이데우마가 있다. 이는 다른 문명권들과 경쟁하는 속에서 유럽인들 가슴 속에 더욱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동북아 나라 모두의 파이데우마를 찾을 수는 없을까?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은 역사나 문화적으로 형제처럼 가깝다. 서로의 민족감정을 앞세우기 전에, 세 나라가 공동의 역사와 문화를 지닌 ‘공동체’임을 분명히 하는 과정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가까워지면서도 꼬여 가는 한중일의 관계를 바라보며 드는 생각이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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