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뉴턴 펙의 소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의 이야기이다. 핑키가 사람이었다면 어떨까? 그래도 핑키는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을 터다. 아이와 아버지가 돼지를 사랑한 만큼이나, 그들의 생활 역시 절박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우리는 또 다른 돼지의 죽음을 보았다. 경기 이천시의 일부 시민이 새끼 돼지의 네 발을 묶어 찢어 죽였다. 군부대가 자기 고장에 이사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란다. 그런데 군부대 이사 반대와 돼지 도살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자꾸만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하긴 예부터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 많기는 했다. 기독교 성경에도 죄를 용서받기 위해 신에게 어린 양을 바치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어린 양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 자신들의 죗값을 대신 치르는 불쌍한 양을 바라볼 때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죽어가는 양은 보는 이들의 양심을 한껏 뒤흔들어 놓았을 터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올곧게 다잡겠다는 결심도 새롭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위에서 능지처참된 돼지는 어떤가. 그 돼지는 신에게 용서를 빌기 위한 제물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보여 주기 위한 퍼포먼스에 쓰인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돼지의 비명을 듣고 국민은 이천 시민의 분노를 이해하게 되었을까? 정부는 과연 정책의 잘못을 인정하게 되었을까? 그 어느 쪽도 아니다.
시위 현장에서의 돼지 도살은 ‘자해 공갈단’의 협박에 가깝다. 자기 몸에 칼을 죽죽 그으며 상대의 기를 죽이려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자기 몸도 아닌, 아무 힘없는 돼지에게 칼질을 해댔다는 점에서 그들의 행동은 더 끔찍하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에서 핑키를 죽이던 아버지는 누구도 미워할 수 없다. 가장 친한 벗을 죽인 아버지의 손에 입맞춤하는 아들의 심정을 독자들은 기꺼이 이해해 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시위에서 돼지를 찢어 죽인 사람들의 절박함에 가슴 아파해 줄 이들은 얼마나 될까? 생명의 소중함을 보듬지 못하는 모습이 슬플 뿐이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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