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성희]대학졸업장 ‘디스카운트’

  • 입력 2007년 6월 7일 03시 00분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최초의 장편소설 이광수의 ‘무정’에는 일본 도쿄 유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빌어먹는 신세였던 형식은 평양의 개화한 지식인 박 진사의 은혜로 공부를 하게 되고 나중엔 도쿄 유학까지 마치고 귀국한다. 경성학교 영어교사인 그는 미모의 신여성인 김 장로의 딸 선형과 옛 은인 박 진사의 딸 영채 사이에서 고민하다 선형을 선택한다. 거부(巨富)인 김 장로는 맨몸뚱이이지만 대학졸업장이 있는 형식에게 ‘투자’한다.

▷어느 나라건 왕조가 몰락하고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대학졸업장은 신분 상승의 유일한 통로였다. 그러나 이제는 대학졸업장만으로는 상류사회 진입은 물론 중산층이 되는 데도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소식이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진은 대졸자의 평균 임금상승률이 미국 사회의 생산성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고, 현 세대의 평균 소득이 30년 전 아버지 세대의 소득보다 12% 적다며 대학졸업장 무용론을 폈다.

▷중국에서도 대학졸업장의 위력은 크게 떨어졌다. 대학 정원이 늘면서 매년 413만 명이 대학 문을 나서지만 60%가 실업자 신세다. 우리와 달리 법대와 의대의 취업률이 가장 낮다. 최근에는 칭화(淸華)대 같은 명문대도 졸업생의 자살이 속출해 사회 문제가 될 정도다. 경제가 급성장하지만 대부분 단순노동을 요구하는 제조업의 비중이 커서 고학력자가 갈 곳이 없다. ‘소황제’로 자란 신세대가 힘든 일을 기피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대졸 취업률은 67%에 그쳤다. 현 정부의 각종 기업 규제와 이로 인한 불황 탓이 크지만 대졸자 공급과잉 탓도 있다. 1976년 전문대를 포함한 4년제 대학 졸업자는 5만8300여 명에 불과했지만 30년 후인 2006년엔 50만 명에 이르렀다. 대학 진학률이 80%에 이르는 상황에서 대학졸업장이 취업 보증수표가 될 순 없다. 학력 인플레이션과 저성장이 취업난을 부르고, 나아가 민주주의의 기반인 중산층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대학졸업장 ‘디스카운트’의 우울한 이면이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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