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씨의 서울대 언어학과 5년 선배인 남승호 교수는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인문대로 향하는 길목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박 씨와 함께 걷던 교정에서 까마득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박 씨는 캠퍼스 길목에 쓸쓸한 동상으로만 남아 있다. “학교 안에서 종철이 기념사업도 점점 잊혀지는 것 같습니다.”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 씨가 숨진 지도 20년. 남 교수를 비롯해 박 씨의 동문인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들은 꺼져 가는 박종철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싶어 한다.
이들은 이참에 박종철기념사업회와 함께 언어학과 사무실 앞 휴식 공간을 ‘박종철 광장’으로 꾸밀 생각이다. 학교 측이 허락하면 ‘박종철 강의실’과 ‘박종철 도서관’을 만들 구상도 갖고 있다.》
○ “박종철은 영원히 기억해야 할 이름”
“요즘 학생들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 책임의식이 부족한 편이죠.”
20년이 흐른 뒤에도 교정을 지키고 있는 남 교수는 최근 기자를 만나 달라진 대학사회 얘기부터 꺼냈다. 그는 학생들이 최소한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사회의 초석을 이룬 이들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그런 점에서 박 씨는 학생들에게 공동체의 의미를 한 번쯤 생각하게 하는 존재라는 것.
언어학과 앞의 공간에 ‘박종철’이란 이름 석 자를 붙이려는 것도 학생들이 쉬면서 자연스럽게 박 씨를 기억해 줬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지금 대학엔 서로 어울리는 공동체 생활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혼자 노는 ‘폐인’이 생겨나는 것이죠.”
남 교수는 얼마 전 주말 오전에 학교 기숙사를 둘러보며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느꼈다. 학생들은 각자 컴퓨터 앞에 앉아 있거나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는 ‘기숙사 폐인’이 대부분 이었던 것. 어울려 즐기는 대학 문화는 보이지 않았다.
남 교수는 “고민을 나눌 친구 없이 혼자 학교생활을 하는 학생이 늘었다”며 “문제를 대화로 함께 풀지 않으니 정신 장애를 앓거나 자살하는 학생이 느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이 ‘경쟁’에만 몰입하기보다는 학생들의 ‘삶의 질’을 높여 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도 했다.
○ “그 시대 사람들의 과제”
박 씨의 절친한 동기였던 신효필 교수는 “화창한 날씨에 쓸쓸히 서 있는 종철이를 보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는 더구나 종철이를 모른다는 제자들의 말을 들으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신 교수는 동기들보다 1년 늦게 입학한 박 씨가 재수생활 동안 입시 공부 외에 민주화와 사회문제에 대해 공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지금 재수생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라는 것. 그는 요즘 신입생과 상담을 하며 지나치게 현실적인 모습을 접하면 흠칫 놀라곤 한다고 털어놨다.
“학생들이 인문, 사회 분야에 무관심한 게 어디 자신들의 탓이겠습니까. 제도의 잘못이고 사회의 잘못이죠.”
그는 “사회의 한 분야로 뛰어들어 ‘왜’라고 묻는 일은 결코 뒤처지는 일이 아니니 학생들이 폭넓은 분야에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고 조언했다. 박 씨의 3년 선배인 전종호 교수는 기자의 전화를 받는 순간 20년 전의 기억이 눈앞에 펼쳐져 가슴이 아팠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 교수는 “후배들에게 종철이와 민주화를 기억하도록 해야 할 사람들이 임무를 다하지 못한 듯하다”며 무거운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말을 아꼈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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