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창용]헛투자만 하는 우리 교육

  • 입력 2007년 6월 11일 03시 04분


얼마 전 외국인학교에 다니는 친구 아들이 경제학 관련 수필을 들고 찾아왔다. 대학 진학을 위해 준비한 글이니 한번 읽어 달라는 부탁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대학 수준의 글이었다. 언제 대학 수준의 경제학까지 공부했는지 물어보니 중학교 때부터 배웠단다. 한 학기에 필수과목 4개, 선택과목 3개를 듣는데 경제학이 재미있어 3년째 선택과목으로 택했다고 한다.

친구 아들을 보니 20년 전에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만났던 데이비드가 생각났다. 당시 그는 학부 2학년인데 대학원 수업을 듣고 있었다. 성적이 우수해서 언제 경제학을 배웠는지 물었더니 고등학교 은사가 은퇴한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였단다. 그 교사가 자기 제자인 하버드대 교수에게 추천서를 써 줘 입학하게 됐고 입학 때부터 조교 일을 하면서 논문을 쓰고 있었다. 노벨상 수상자가 어떻게 길러지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국내 중학교 2학년인 내 딸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이야기다. 내 딸은 한 학기에 13과목을 듣고 있다. 오늘도 시험 준비를 하느라 부엌의 싱크대와 냉장고 사이는 몇 m가 최적인가, 겨울철 자동차 냉각수는 몇 도에 어는가 하는 내용을 외운다.

과목-전공 선택 공급자 위주

사람마다 키가 달라 최적의 길이는 다를 수 있고 냉각수 온도는 인터넷을 찾아보면 되지 굳이 외우고 다녀야 하는가. 쓸데없는 지식이라 믿어도 그 과목을 듣지 않을 자유가 없다. 그 과목의 시험 성적이 나쁘면 다른 과목을 잘해도 내신 성적이 나빠지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음악을 싫어해도 피아노 치는 시늉을 해야 하고 운동이 싫어도 줄넘기 과외를 받아야 한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도 문제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수많은 과목에 시간을 나누다 보니 집중과 선택을 할 수 없다. 음악을 좋아해도 직접 악기를 들고 연주할 시간이 없다. 고작해야 다른 공부를 하는 중에 노래를 듣는 게 전부다.

우리 교육은 소비자는 길러 내도 전문성을 지닌 생산자는 길러 내지 못한다. 전 세계를 상대로 경쟁하고 중국과 인도의 추격을 벗어나려면 전문가를 육성해야 하는데 여러 과목 교사의 직업을 보장해 주려고 한참 거꾸로 간다.

중고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과목을 대충 배운 고등학생이 자기 적성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대학만이라도 전공 구분 없이 학생을 선발한 후 수강한 과목에 따라 전공을 정해 주자는 논의가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말뿐이다. 법대, 경영대 등 인기 학과만 살아남고 학문의 다양성이 사라진단다.

과연 그럴까. 해외 유명 대학은 학과 구분 없이 신입생을 뽑아도 학문 수준이 높고 다양성이 보이는 건 무슨 이유인가. 억지로 전공을 못 바꾸게 하면 몸은 그 학과에 있어도 마음은 콩밭에 간다. 학문의 다양성이 아니라 사회적 수요가 사라진 과목의 강좌 폐지나 교수 감축을 막는 데 기여할 뿐이다.

우리 사회는 생산자 위주에서 소비자 위주로 변해 가고 있다. 기업뿐 아니라 관료도 국민 눈치를 보는 시대가 됐는데 유독 교육계만 변하지 않는다. 학교 선택, 과목 선택, 전공 선택 모두 학생과 학부모를 무시한 채 공급자인 교사, 교수, 교육 공무원의 목소리만 가득하다.

교수 은퇴 뒤 교사 하고 싶어도

자신이 선택한 과목을 행복하게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생긴다면 학원에 주는 사교육비를 모두 바쳐서라도 내 아이를 보내고 싶다. 가급적이면 이런 학교는 지방 산골에 널찍하게 자리 잡고 기숙사 시설이 잘되어 있으면 좋겠다. 아파트촌에서 뛰어놀지 못했던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어놀아 몸과 마음이 편해졌으면 좋겠다. 주말에는 가족을 데리고 학교를 방문하면 지방 경제에도 도움이 될 테니 이보다 더 좋은 균형발전 전략이 있겠는가. 나 또한 은퇴하면 이런 학교에 교사로 가서 데이비드 같은 영재를 길러 내고 싶다.

아! 이 꿈은 불가능하다. 나는 경제학을 많이 알아도 교대나 사범대를 나오지 않아 교사자격증이 없기 때문이다. 학생과 교사 중 누구를 위해 만든 교육제도인지, 전교조가 왜 그렇게 평준화에 집착하고 학교 서열화를 반대하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창용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한국채권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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