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영화를 찍었다. 록 밴드를 만들고 전자기타를 쳤다. 친구들과 술도 마셨다….
서울대 전액 장학생인 영문학과 06학번 유상근(20) 씨. 경기 고양시 일산에서 보낸 그의 중학시절은 여느 서울대생과 달랐다. 그가 마음을 다잡은 건 생각 없이 함께 노는 줄로만 알았던 친구들이 민족사관고, 외국어고에 줄줄이 합격하던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열심히 놀 줄 알았던 그는 열심히 공부할 줄도 알았다. 마음을 잡고 난 뒤 유 씨의 성적은 전교생 580여 명 중 289등(중2)에서 40등(중3)으로 가파르게 올랐다. 그의 공부 원칙은 단 한가지였다. ‘나 스스로, 주도적으로 한다’는 것.
그는 수능시험 전국 0.001%안에 든 국내외 명문대생 9명의 공부전략을 엮은 책 ‘공부의 신(神)’을 펴낸 저자 중 한 명. 선배들의 수험 노하우를 전하는 무료 강의 사이트 ‘공신닷컴’(www.gongsin.com)에서 ‘공신(工神·공부의 신의 줄임말)’ 1기로 활동 중이다. 중고교 시절 영화와 연극 대본을 직접 썼다는 유 씨는 ‘공신’들이 인정하는 ‘논술의 신’이기도 하다.
○ 논술학원, ‘곰’보단 ‘여우’처럼 다녀라
“논술학원에 다니거나 대형 학원 인터넷 유료 강의를 듣는 건 학원에 돈을 고스란히 갖다 바치는 꼴입니다. 논술점수를 더 떨어뜨리는 길이에요.”
윤 씨가 이런 생각을 갖는 데는 이유가 있다. 논술시험은 그 사람이 오랫동안 쌓아 온 △사고의 깊이 △정보량의 깊이 △표현능력을 두루 평가하는 ‘정직한’ 과목이기 때문이다.
학원에서 나눠 주는 주제별 ‘모범답안’이나 두꺼운 고전서 한 권을 A4 용지 단 한 장으로 요약한 ‘요약본’은 논술시험에서 ‘약’보단 ‘독’이 되기 쉽다. 창의성을 중요 평가요소로 삼는 서울대 논술에서 모범답안을 그대로 베껴 쓴 문장과 예시는 점수만 깎인다. 예를 들어 890쪽짜리 플라톤의 ‘국가’를 한 장짜리 요약본으로 읽은 고등학생이 마치 책을 다 읽은 것처럼 논술에 인용한다면 그 답안은 진짜 내용과는 방향이 전혀 다를 수도 있다.
“대학교수들은 이미 그 책을 다 읽어 본 사람이에요. 그분들이 책 내용도 제대로 이해 못한 고등학생의 글을 보면 우습지 않을까요? 교수들이 고등학생에게 원하는 건 ‘잘 쓴’ 답안이 아니라 ‘여태껏 보지 못한’ 답안입니다. ‘올바른’ 사고를 보려는 게 아니라 ‘새로운’ 사고를 보려는 거니까요.”
그는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직전까진 시사주간지를 빠짐없이 읽고, ‘계몽의 변증법’ ‘자본론’ ‘공리주의’ 같은 고전을 통독해 배경지식을 쌓았다. 논술시험 1개월 전부터는 학원에서 논술 쓰기와 첨삭 등 실전훈련을 쌓았다. 대형 논술학원이 수시나 정시 논술시험 한 달 전에 여는 실전특강은 출제경향, 표기법, 개요쓰기, 첨삭 등을 배울 수 있어서 유용했다. “논술학원에 끌려 다니지 말고,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학원을 지혜롭게 이용하라”고 그는 조언한다.
○ 답을 상상하기보단 문제를 상상하라
“제 논술 실력의 7할은 시사주간지가 키워 준 거예요.”
유 씨는 고등학교 3년간 정기 구독한 시사주간지를 논술시험의 일등공신이라고 했다. 객관적 사실과 논평, 사회에 끼칠 파장, 박스기사로 된 뒷이야기까지 하나의 이슈를 2, 3쪽에 걸쳐 통으로 꿰고 있는 것이 시사주간지의 특징. 시사 상식은 물론 논리적 글쓰기를 익힐 수 있다. 재미난 기사가 많아 기분전환에도 좋다. 두꺼운 독서월간지는 다 읽지도 못하고 미뤄 놓기가 일쑤라 오히려 ‘숙제’처럼 부담감만 줄 수 있다.
유 씨는 사회적 이슈를 체계적으로 풀어낸 분석 기사나 처음 보는 신선한 시각의 기사는 ‘논술에 써먹으려고’ 따로 오려뒀다. ‘읽은 내용을 답안으로 요구할 만한 논술 문제가 나온다면 어떤 문제가 나올 수 있을까’를 역(逆)으로 유추해 보았다.
유 씨는 ‘주류 문화와 비주류 문화’에 대한 의견을 물었던 서울대 구술면접에서도 마침 며칠 전 오려 둔 시사주간지 기사 한 토막을 인용했다. 한 인디 밴드가 지상파 생방송 음악프로그램에서 성기를 노출했던 사건을 예로 들었다. “프로이트의 심리학 이론에 의하면 억압된 욕망은 괴물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기사 내용을 인용하면서 “사건 발생 뒤 당시 서울시장이 인디밴드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기로 한 결정은 ‘비주류 문화를 발굴하고 이끌어야 할 주류 문화의 역할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당시 구술면접 전에 기사를 다시 읽으면서 ‘이 기사는 사회의 권력관계에서 작용-반작용 현상이나 대중문화의 균형이라는 테마에 인용할 수 있겠구나’라고 미리 생각해 둔 것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책을 읽는 때는 요약본을 보면서 이것저것 ‘잡식’하지 말고 한 권을 읽더라도 끝까지 읽는 게 좋다. 유 씨는 자기 수준보다 어려운 책을 붙잡고 ‘한 문장 한 문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넘어간다’는 생각으로 읽었다. 생각해 볼 만한 문구에는 반드시 밑줄을 그었다. 책 여백에는 ‘내 생각과 다른 점은 이것이다’, ‘현실에선 이렇게 적용해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유치한 표현이다’ 식으로 생각을 자유롭게 메모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고교 1, 2학년 때 매달 5, 6권을 읽었다.
최세미 기자 luckyse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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