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음 김상헌(1570~1652)이 병자호란 때 청(淸)나라에 항복해서는 안 된다며 끝까지 척화를 주장하다 중국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읊은 시조다.
이 시조에 나오는 ‘삼각산’은 지금의 ‘북한산’을 지칭한다. 서울을 상징하며 한국의 5대 명산 중 하나로 꼽히는 삼각산(북한산). 그 산이 언제부턴가 북한산이란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최근 자치단체와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삼각산 명칭 복원’ 운동이 활발하다.
“북한산은 산 이름 아닌 지명일 뿐”
‘삼각산’은 인수봉(810.5m), 백운봉(836.5m), 만경봉(799.5m)의 세 봉우리가 삼각형으로 나란히 솟아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시대에는 부아악, 화악 등으로 불리다 고려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삼각산으로 불렸다. 무려 1000년 이상 불리던 명칭이다.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등 여러 역사서와 지리서뿐 아니라 문인들의 시와 산문에도 등장한다.
박경룡 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은 “고려시대 이후 삼각산으로 불려오다 조선 후기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성하면서 북한산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아졌고 정조 때는 삼각산과 북한산이라는 칭호가 혼용됐다”고 했다.
그러나 이때의 북한산은 산 이름이 아니라 한강 이북의 큰 산을 의미하는 일반명사 또는 지명이라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은 “삼국사기 등 사서를 보면 삼국시대 때 한강 유역은 ‘한산’이라고 불렸다. 강을 중심으로 한강 이북은 북한산, 한강 이남은 남한산이라고 했다. 산 이름이 아니라 지명으로 오래도록 사용됐다”고 지적했다.
“일제가 삼각산을 북한산으로 창씨개명”
그렇다면 단순한 지역명이 어떻게 산 이름으로 바뀌게 됐을까. 일제에 의해서라는 설이 유력하다. 1915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을 지낸 금서룡(今西龍)이 삼각산 유적을 탐방한 뒤 보고서에 북한산으로 명명한 뒤부터 널리 통용됐다는 것.
이후 1983년 북한산과 도봉산 일대를 묶어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 이름이 완전히 뿌리내리게 됐다.
건설교통부 산하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행하는 지도를 비롯해 국립공원관리공단이 관리하는 산 표지기 등 모든 공식 명칭이 북한산으로 명기돼 있다.
박 전 연구원은 “북한산으로 굳혀진 것은 역사적 배경을 무시한 채 삼각산 지역과 도봉산을 함께 ‘북한산국립공원’으로 명명하게 되면서부터였다”며 “이대로 두면 북한산이 삼각산과 도봉산 일대를 모두 일컫는 산 이름으로 잘못 인식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북한산 관할 행정기관인 강북구청(구청장 김현풍)이 ‘삼각산 명칭 복원’ 운동에 발 벗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김현풍(66) 구청장은 “세 개의 봉우리가 하나의 화강암으로 이뤄진 삼각산은 세계에서 기가 가장 센 산”이라며 “풍수지리를 중히 여기는 일본은 한민족의 정기가 여기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삼각산 의미를 퇴색시키기 위해 단순히 한강 북쪽에 있다는 뜻의 ‘북한산’으로 창씨개명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제는 이름만 바꾼 게 아니라 백운봉에 쇠말뚝도 박았다”고도 했다. (쇠말뚝은 수년 전 흥사단에 의해 제거됐다.)
“100년 역사 지닌 북한산 명칭의 가치도 인정해줘야”
강북구청의 노력으로 2003년 10월31일 삼각산이 국가지정문화재(명승 제10호)로 지정됐다. 이에 고무된 강북구청은 삼각산 명칭 복원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2004년 2월10일 건설교통부에 삼각산 명칭 변경을 의뢰해 건교부로부터 “서울시 지명위원회를 거쳐 다시 상정하라”는 회신을 받았다. 구청은 즉각 서울시에 요청했고, 2004년 3월11일 ‘서울시 제1차 지명위원회’가 열렸다. 지명위원회는 ‘삼각산에 대한 관련자료 연구·검토 및 보다 정확한 고증절차를 거쳐 추후 재심의 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류 결정’인 셈이다.
이에 자극받은 강북구청은 ‘삼각산’ 명칭의 저변 확대에 심혈을 기울였다. 학계·시민단체 등 관련 전문가는 물론 시민을 상대로 간담회 및 포럼 개최, 서명운동 등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또한 미아동 풍림아이원을 삼각산아이원아파트로, 강북구민회관을 삼각산문화예술회관으로 바꾸는 등 관공서, 학교, 아파트 건물에 삼각산 이름을 넣는 운동도 전개했다.
그러나 이견도 있다. 북한산이라는 명칭도 나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고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다.
김윤우 위원은 “조선시대 말 추사 김정희 선생의 추사집에는 ‘북한산’이 산 이름으로 기록돼 있다. 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 100년 이상 써왔다”며 “삼각산 명칭이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해도 북한산이 나름의 역사를 갖고 있다면 그 가치를 인정해줘야 한다”고 반박했다.
김 위원은 “굳이 정착돼 있는 이름을 바꾸겠다고 하면 이미 정해져 있는 다른 이름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반문한 뒤 “모든 이름을 옛 명칭으로 환원하려 한다면 한도 끝도 없다”며 “‘북한산’ 명칭이 잘못됐다는 건 학술적 의미에선 옳지 않다”고도 했다.
김승훈 동아닷컴 기자 h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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